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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시간

구석의 시간 자료집을 찾으려 소파를 밀어냈다. 오랜 시간 밀봉되었던 책장이 부스스 눈을 뜬다. 뽀얀 먼지가 반기를 들며 사방으로 흩날린다. 바닥엔 검은 비닐봉지 하나, 백 원짜리 동전 두어 개, 작은 손걸레, 신문지 몇 장, 약봉지, 검은 고무줄 등 잡동사니들이 먼지와 뒤엉켜 널브러져 있다. 몇 년 전 이사하면서 갖고 있던 책 중 반 트럭 가까이 나눠주었는데도 책장이 부족해 몇 개를 더 샀다. 서재와 거실에 분산하여 놓고 보니 소파가 들어갈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책장을 등지고 소파를 바짝 붙여 놓았다. 소파는 버젓이 제 몫을 하는데 구석으로 밀려난 책장은 존재감이 없다.직사각형의 책장과 곡선의 소파 사이가 헤벌어져 휑뎅그렁했다. 이것저것 갖다 꿰맞추어 보아도 영 신통치 않았다. 두툼한 사전과 키 큰 앨..

문예지 발표작 2020.10.21

물꼬를 트다

물꼬를 트다 이승애 말끔하게 닦은 후 물 내림 버튼을 눌렀다. ‘쿠르륵 촤악’ 경쾌한 음과 함께 내려가야 할 물이 위로 솟구쳤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이제 곧 산행 갔던 그가 돌아오면 욕실로 직행할 것이다. 변기를 뚫을 만한 도구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질 않는다. 궁여지책으로 철사 옷걸이 몇 개를 집어 들었다. 구부러진 부분을 곧게 펴서 새끼처럼 꼰 뒤 끝부분에 헝겊을 둥글게 말아 감고 비닐로 감싼 후 고무줄로 꽁꽁 묶었다. 이 이상야릇한 물건을 배수구 구멍 속으로 밀어 넣고 하나, 둘, 셋 구령을 외치며 힘껏 힘을 가했다. 그러나 내 발명품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헛수고만 해댔다. 포기할 수 없어 열 번 스무 번 더 강하게 쑤셔댔지만 막힌 변기는 요지부동 뚫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문예지 발표작 2020.07.29

간격

간격 이승애 갈고리 같은 손으로 우매한 이웃 멱살 잡는 꼴 좀 보소. 시푸르둥둥한 줄기를 꽈배기처럼 뒤틀어선 뻗어가는 저 우악스러운 작태. 소 엉덩짝만한 텃밭에 고추, 가지, 상추, 부추, 쑥갓, 케일 등 푸성귀 예닐곱 포기씩 심었다. 이튿날 나가 보니 누군가 밭 가장자리를 빙 둘러 호박 모종 여남은 포기를 심어 놓았다. 가뭄에 바짝 마른 땅은 어린 생명을 품어 안을 수 없었는지 축 늘어져 산 듯 죽은 듯 미미한 숨결만 토해냈다. 한달음에 달려가 물 한 동이 떠다 흠뻑 적셔주고, 둥그렇게 고랑을 타 거름까지 준 뒤 아쉬운 대로 은박 돗자리 하나 가져다 그늘막을 만들어 주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텃밭에 정성을 들였더니 황달 든 듯 누렇게 떴던 푸성귀들이 윤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중 으뜸은 호박이다. 잘 삭..

문예지 발표작 2020.05.25

바위를 굴리다

바위를 굴리다 이승애 어머니께서 안방으로 건너가시자 나는 모옌의 ‘붉은 수수밭’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뒤통수가 서늘하게 느껴져 고개를 드니 어머니가 도끼눈을 하고 바라보셨다. 웬일인가 싶어 어머니를 바라보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덮쳤다. “어디에서 굴러먹다 온 씨앗이 내 딸과 엄마를 내쫓고 거기 앉아 있느냐?” 갑자기 돌변한 어머니로 인해 고요하던 공기가 팽창하더니 쨍강쨍강 부서진다. 슬그머니 일어나 뒤꽁무니를 빼는데 어머니께서 재빠르게 내 팔을 휘어잡으셨다. 도망에 실패했으니 이제는 꼼짝없이 어머니의 먹구름 속으로 침몰하든가 그 먹구름을 걷어내야 한다. 숨을 고르고 어머니 손을 잡고 마주 앉아 기억을 불러올 요량으로 다리를 걷어붙였다. 어릴 적 뽕나무밭에서 넘어져 생긴 동그란 흉터와 계..

문예지 발표작 2020.03.31

농다리에서 만난 피에타

농다리에서 만난 피에타이승애세금천을 둘러싼 산자락이 농염한 여인처럼 한껏 무르익어간다. 산발치에 흐르는 물줄기는 왜 그리도 바삐 가는지. 오늘도 농다리는 오가는 이의 촬영장이 되어 활기가 넘친다. 우리도 은근슬쩍 그 대열에 끼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사람과 자연이 지네 형상의 다리와 오묘하게 어우러져 또 하나의 그림이 된다.초롱길에서 만난 가을은 더 깊고 아름답다.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케케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씻겨나간다. 나뭇잎 하나가 상념에 젖은 내 어깨를 슬쩍 스치고 떨어진다. 나뭇잎 색깔이 매혹적이다. 허리를 굽혀 주워 든다. 아뿔싸! 아름다운 색깔과는 달리 벌레에게 먹힌 상처가 애처롭다. 화려하게 물든 나뭇잎들을 살펴본다. 어느 것 하나 성한 게 없다. 벌레에게 먹히고..

문예지 발표작 2020.01.15

방지턱

방지턱 이승애   눈앞에서 손사래 치는 방지턱을 무시해버렸다. 눈앞이 아찔하였다.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다음 방지턱도 무시하고 액셀레이더를 밟았다가 된통 당하였다. 그 바람에 뒷좌석에 놓여있던 감자 박스가 홀딱 엎어지고, 장바구니가 옆으로 쓰러져 호박이며 가지, 두부, 대파가 와르르 쏟아져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저 방지턱쯤이야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자만이 불러온 결과이다.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 꼴이 되어 갓길에 주차하고 정리해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달려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오방난장五方亂場이 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널브러진 물건을 정리하는데 씁쓰레하다. 내 인생도 빠름 빠름이었다. 넘어지고 여기저기 긁혀 온전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오랫동안 일에만 치여 허덕대다 보니 활어처럼 펄떡대던 삶..

문예지 발표작 2019.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