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꼬를 트다
이승애
말끔하게 닦은 후 물 내림 버튼을 눌렀다. ‘쿠르륵 촤악’ 경쾌한 음과 함께 내려가야 할 물이 위로 솟구쳤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이제 곧 산행 갔던 그가 돌아오면 욕실로 직행할 것이다. 변기를 뚫을 만한 도구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질 않는다. 궁여지책으로 철사 옷걸이 몇 개를 집어 들었다. 구부러진 부분을 곧게 펴서 새끼처럼 꼰 뒤 끝부분에 헝겊을 둥글게 말아 감고 비닐로 감싼 후 고무줄로 꽁꽁 묶었다. 이 이상야릇한 물건을 배수구 구멍 속으로 밀어 넣고 하나, 둘, 셋 구령을 외치며 힘껏 힘을 가했다. 그러나 내 발명품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헛수고만 해댔다. 포기할 수 없어 열 번 스무 번 더 강하게 쑤셔댔지만 막힌 변기는 요지부동 뚫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난제를 속히 해결하기 위해 막힌 배수구를 뚫어준다는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내 수리공이 도착했다. 그는 특수하게 생긴 쇠막대를 변기 속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더니 막힌 부분이 없는 것 같단다. 막힌 곳이 없는데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니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는데 수리공도 당황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변기와 씨름하던 그가 배수구와 연결되었던 변기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린 배수구에 물 한 동이를 부었다. 시원하게 내려갔다. 배수구엔 아무 문제가 없는 듯했다. 수리공은 변기를 엎어놓고 구멍마다 쇠막대로 쑤셔대더니 다시 변기를 세워 놓고 물을 부었다. 물은 여전히 역류해 화장실 바닥으로 질펀하게 흘러내렸다.
마법에 걸린 듯 꼼짝하지 않는 변기를 바라보다 상념에 젖는다. 아무리 뚫으려 해도 막힌 물이 흘러내리지 못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수녀원에서 생활하다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빠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본디 사람을 좋아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오빠는 있는 듯 없는 듯 봉쇄 수도원 수도자처럼 조용히 살라고 했다. 눈감고 귀 막고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라는 요구였다. 나는 이 옥죄고 있는 틀에서 헤어나고 싶어 안달을 냈지만 그 틀이 견고하여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세월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스러지면서 내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하게 변해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반생애를 훌쩍 지나오면서 나답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더는 기본적인 욕구에 만족하며 살 수는 없었다. 도전장을 내밀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곧 나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보수적인 오빠도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대학을 옮겨 다니며 이 공부 저 공부를 하고 취미를 살려 한복에 그림도 그려보고, 닥종이로 인형을 만드는 일에 빠져보기도 하였지만 정체된 영혼의 물꼬를 터주지는 못했다.
우연히 청주시에서 운영하는 1인 1책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서 소녀시절부터 목마르게 소망했던 문학과 대면하게 되었다. 문학은 끊임없이 내 영혼에 호스를 꽂고 펌프질을 해댔지만 뚝눈인 나는 쉽게 물꼬를 트지 못했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쓴 글들이 휴지 조각처럼 버려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막힌 변기 꼴이 되어 갈팡질팡하였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수리공이 급하게 부른다. 그는 무슨 큰일을 해결한 것처럼 들떠있다. “이것 봐유. 변기에 금이 갔네유. 그것 때문인 것 같어유.” 그가 손가락으로 변기 뒤쪽에 금이 간 부분을 가리켰다. 변기통에 금이 간 것과 물이 흐르지 못하는 것이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먹통이 되어 버린 변기에 더 이상 물을 가둬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재빠르게 공구함에서 카탈로그를 꺼내 들이밀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물을 가두고 꿈쩍도 하지 않던 변기는 퇴출당하고 말았다. 새 변기가 설치되었다. 깨끗이 닦은 후 물 내림 버튼을 눌렀다. 물이 기분 좋게 ‘쿠르르 촤악’ 내려간다.
나는 막혀버린 사고를 뚫기 위해 고전을 읽고, 시를 읽고,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읽으며 글을 썼다. 조금씩 글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달콤 쌉싸름한 문학의 품에서 뒹굴 때마다 마음밭에 뿌리내렸던 아픔과 슬픔, 헛된 욕망의 찌꺼기들이 흘러가고 아물지 않았던 생채기에서도 새살이 돋는다. 아직은 어설픈 글쟁이에 불과하지만 문학의 품에 안겨 그와 입맞춤을 하고 심장박동을 들을 때면 내 영혼은 펄떡이는 활어가 된다.
엊그제 쓰다만 글을 꺼내 옷을 입힌다. 그동안 막혀있던 문장이 스르르 몸을 풀고 세상 밖으로 나올 채비를 한다. ‘쿠르륵 촤악’ 내 마음밭에서 또 하나의 찌꺼기가 흘러가고 새로운 문장 하나 새겨진다. 이 아름다운 순환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수필과비평 202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