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발표작

간격

이승애 2020. 5. 25. 07:34

간격

 

이승애

 

갈고리 같은 손으로 우매한 이웃 멱살 잡는 꼴 좀 보소. 시푸르둥둥한 줄기를 꽈배기처럼 뒤틀어선 뻗어가는 저 우악스러운 작태.

엉덩짝만한 텃밭에 고추, 가지, 상추, 부추, 쑥갓, 케일 등 푸성귀 예닐곱 포기씩 심었다. 이튿날 나가 보니 누군가 밭 가장자리를 빙 둘러 호박 모종 여남은 포기 심어 놓았다. 가뭄에 바짝 마른 땅은 어린 생명을 품어 안을 수 없었는지 축 늘어져 산 듯 죽은 듯 미미한 숨결만 토해냈다. 한달음에 달려가 물 한 동이 떠다 흠뻑 적셔주고, 둥그렇게 고랑을 타 거름까지 준 뒤 아쉬운 대로 은박 돗자리 하나 가져다 그늘막을 만들어 주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텃밭에 정성을 들였더니 황달 든 듯 누렇게 떴던 푸성귀들이 윤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중 으뜸은 호박이다. 잘 삭힌 거름을 먹어서인지 힘이 넘쳤다. 덩굴손을 쭉쭉 뻗어 서로의 손을 잡고선 밭 안쪽으로 발을 들이미는가 싶더니 곧 억센 손으로 가지의 발목과 고추의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키가 나지막한 잎채소들은 만만해 보였는지 아예 등을 타고 올라와 구렁이처럼 칭칭 감아버렸다. 짓눌린 푸성귀들은 휘어지고 꺾여 앓는 소리를 내건만 호박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은 꼭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보는 듯하다. 아당지게 움켜쥔 호박 손들을 풀어 담장 쪽으로 획 제쳐 버렸다. 그러나 호박 덩굴은 반항하듯 더욱 기세등등하게 다시 밭 한가운데로 돌진해 들어왔다. 오만불손한 호박의 무질주를 이대로 지켜보다가는 정성껏 가꾼 달콤쌉싸래한 푸성귀들의 맛도 못 볼 것 같았다. 담벼락에 줄을 매고 중구난방으로 뻗어가는 호박덩굴을 걷어 올렸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텃밭에 햇볕과 바람, 나비, 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도열한 푸성귀 위로 하늘의 에너지가 골고루 내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갔다. 무조건 제 생존을 위해 숨막히게 질주하던 호박도 간격이 주는 미덕 속에서 자유롭게 줄을 타고 뻗어갔다. 함께 하되 서로 침해하지 않는 거리는 평화를 가져다주었고 제각각의 모습을 활짝 피어나게 했다.

우리 모임에 작달막한 키에 어련무던해 보이는 눈매를 가진 여인이 신입회원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적응력이 빨랐다. 무슨 일을 하든 민첩하게 행동하였고,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용케 찾아내 긁어줄 줄 알았다. 이런 사교성으로 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졌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그녀는 나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나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자주 만나고 이야기하다 보니 정이 들어 그녀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뜬금없이 막도장 하나를 가져왔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몇 달 전 어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보증이 필요했는데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없어 내 도장을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만나고 전화 통화를 했어도 아무 말이 없었던 그녀였다. 나는 배신감과 모멸감에 심장이 파도쳤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먼저 이야기를 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아니, 이런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도장을 받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은 관계가 가까워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속엣말을 하게 된다. 어느 땐 서로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도움을 주면서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사람과의 관계를 자기 삶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도 나와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했다. 그 이후 우리는 그녀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지내고 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사람 사이의 관계와 거리를개체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모든 개체는 자신의 주변에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고, 다른 개체가 그 안에 들어오면 긴장과 위협을 느낀다면서 4가지 유형의 거리를 이야기했다. 그가 정밀하게 숫자로 계산하여 사람 사이의 거리를 논하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지만 그만큼 서로의 거리가 유지될 때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사실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묘해서 거리가 멀면 소 닭 보듯 하고, 너무 가까우면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받게 된다. 흉허물 없이 지내는 것은 좋으나 서로를 위해 어느 정도의 간격은 두어야 한다. 천하에 없는 잉꼬부부라도 그들 각자만의 사생활이 있고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것이 존중되지 않을 때 갈등이 생기고 파탄에 이르게 된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 그 간격의 미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지키고 성장한다.

알맞은 간격을 두고 자란 푸성귀 맛은 쌉싸래하고, 고소해 자꾸만 손이 갔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구첩반상 부럽지 않은 풍미를 즐겼다.

뜨거운 열기를 식히는 빗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날, 텃밭으로 달려가 말갛게 익은 호박과 고추를 뚝뚝 따다 숭덩숭덩 썰어 칼국수를 끓였다. 구수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나는 작은 텃밭에서 새로운 경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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