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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환생 이승애 철사를 세 뼘 길이로 두 개 잘랐다. 하나는 가운데를 둥글게 휘어 머리를 만든 후 양쪽으로 펼쳐 팔의 뼈대를 만들었다. 또 하나는 머리와 팔 부분에 끼워 감아 아래로 내려 몸과 다리의 뼈대도 세웠다. 살집 한 점 없는 뼈대가 앙상하다.닥종이를 뭉쳐 머리와 얼굴 부분에 채워 넣었다. 풀칠한 닥종이를 한 겹 한 겹 뜯어 붙일 때마다 내 세포가 분열해 전이된다.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애정을 퍼부었더니 나부죽하고 복스러운 얼굴과 둥그스름한 머리형이 만들어졌다. 이제 누구를 만들까. 모형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몇 시간째 낑낑대도 뾰족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막막하기만 하다. 동네 어귀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본다. 한참 서성대도 내 영감에 와락 안기는 이가 없다. 아쉬움을 안고 골목길을 휘돌아..

나도 보살

나도 보살 이승애 돌부처가 까마득히 치솟은 빌딩 세계를 망연히 바라본다. 사람들은 돌부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제 삶을 꾸리기에 급급하다. 이기심은 하늘을 찌르고 땅을 향한 탐욕은 멈출 줄 모른다. 돌부처는 인간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하는 짓으로 보면 따끔한 훈계라도 하고 싶고 때로는 회초리라도 들고 싶다. 부처가 사바세계에 간섭하는 건 금물이다. 인간 스스로 깨달아야 깨달음이다. 그래서 천년만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돌부처라지만, 자애로운 모습은 간데없다. 얼핏 보기엔 그 모습이 가당치가 않다. 두리뭉실한 얼굴에 눈썹은 위쪽으로 치켜 올라갔고 눈은 샐샐거리고 도톰한 입술은 위로 샐쭉하니 올라갔다. 머리칼은 굵은 파마를 한 시골 아낙 같고, 그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온 귀..

문예지 발표작 2023.08.14

간격, 그 미학을 재다

간격, 그 미학을 재다 이승애 서너 평 남짓 되는 뒤꼍에 흙을 돋우어 텃밭을 만들었다. 손바닥만 한 밭뙈기 하나 생겼다고 농군이 된 양 호들갑을 떨었다. 봄볕이 대지를 일구기 시작하자 육거리시장으로 달려갔다. 거름과 비료 한 포씩 사고, 호미도 조선 호미, 작은 호미 한 자루씩 샀다. 묘판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종을 보자 욕심이 생겼다. 고추, 상추, 가지, 브로콜리, 셀러리, 케일, 방울토마토…. 눈에 보이는 대로 사고 보니 너덧 상자나 되었다. 좁은 텃밭에 이 많은 모종을 심으려니 수를 놓듯 촘촘히 심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파 놓았던 밭이랑을 뒤엎고 고랑과 두둑 사이를 좁혔다. 고추와 고추 틈 사이사이에 상추를 심고, 브로콜리와 셀러리, 케일을 오종종하게 붙여 심었다. 품종별로 심으려고 계획했던 ..

도미노 이론

도미노 이론 아이가 블록을 줄지어 세운다. 블록 하나하나가 자리를 잡는 동안 아이는 온 신경을 모은다. 아이의 세상에는 블록만 존재하는 것 같다. 블록 사이사이 초조와 긴장이 흐른다. 자칫 하나를 건드려 줄지어 무너질까. 지켜보는 내 손끝이 오그라든다. 수백 개의 블록이 거의 완성되었다. 이제 몇 개만 사이에 끼워 넣으면 끝이다. 아이가 조심스럽게 파란색 블록을 집어 들고 빈자리에 끼워 넣고 손을 빼는 순간 새끼손가락이 옆에 세워진 블록 하나에 슬쩍 부딪혔다. 아뿔싸 하나가 무너지자 순식간에 줄줄이 무너져버렸다. 아이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주저앉았던 아이가 주섬주섬 블록을 끌어모은다. 몇 달째 소값이 뚝뚝 떨어졌다. 판로를 찾지 못한 아버지의 한숨은 깊어졌다. 꼴 ..

하늘마

하늘마 이승애 오늘도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근육질의 줄기 위로 뽀얀 햇살이 내려앉는다. 바람도 슬쩍 넘어와 잎들을 간질인다. 푸른 잎들이 나풋나풋 춤을 춘다. 이제 곧 열매가 맺을 것이다. 화려한 꽃과 향기로 매혹하기보다는 튼실한 열매에 승부를 거는 하늘마의 실속있는 생존법이 마음에 든다. 작년 가을, 친구가 하늘마를 한 상자 가져왔다. 평소 먹던 마와는 다르게 생김새가 특이했다. 짙은 암갈색에 오톨도톨한 돌기가 났고 찰흙으로 아무렇게나 빚어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겉으로 보아 어디에 내놓아도 지지 않을 만큼 옹골찼다. 녀석의 속살이 궁금했다. 하나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겼다. 먹음직스러운 노오란 속살이 드러났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한 식감과는 달리 맛은 밋밋했다. 뚝뚝 잘라 우유를 넣고 ..

활자나무

활자나무 바야흐로 온 세상이 꽃길이다. 고인쇄박물관 뜨락에도 봄꽃잔치가 벌어졌다. 모닥모닥 핀 영산홍이 온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삼색제비꽃, 흰색 철쭉꽃, 낮달맞이꽃도 저마다 꽃술을 치켜올렸다. 푸르른 하늘 허공에 상형문자가 만화방창 찍혔다. 꽃을 눈에 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맨 먼저 금속활자 조형물 ‘직지’가 눈길을 끌었다. 활자 장인이 오 년여 간 피나는 노력 끝에 복원한 금속활자이다. 전시관에는 직지와 시대별 인쇄문화 및 한국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활자의 제작과정, 인쇄술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감상하니 삶을 바꾸기 위해 혼을 쏟아낸 선조들의 숨결이 깊게 느껴졌다. 천천히 돌아보는데, 특이한 모양을 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원통형 나무 모양에 작은 솔방울 같은 것이 다..

비닐우산 / 정진권

비닐우산 정진권 언제 어디서 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집에도 헌 비닐우산이 서너 개나 된다. 아마도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서 내가 사 들고 온 것들일 게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나 제대로 쓸 수 있을까? 그래도 버리긴 아깝다. 비닐우산은 참 볼품없는 우산이다. 눈만 흘겨도 금방 부러져 나갈 듯한 살하며, 당장이라도 팔랑거리면서 살을 떠날 듯한 비닐 덮개하며, 한 군데도 탄탄한 데가 없다. 그러나 그런대로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주 몰라라 할 수만은 없는 우산이기도 하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비를 만날 때, 가난한 주머니로 손쉽게 사 쓸 수 있는 우산은 이것밖에 없다. 물건에 비해서 값이 싼지 비싼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일금 일백 원으로 비를..

좋은 수필 2022.03.16

때죽나무 경전/최장순

때죽나무 경전 최 장 순 쪽동백과 4촌쯤 되는 사이란다. 그러나 꽃차례나 잎사귀의 크기로 때죽과 쪽동백을 구별한다. 시제時祭참석차 고향에 내려갔다가 들른 대관령 기슭의 솔향수목원. 싱싱한 금강송 내음에 취한 산책길에서 꽃송이 가득 매달고 있는 몇 그루 때죽나무를 만난 것은 보너스였다. ‘눈종’snowbell이라 불리기도 한다. 정말 하얀 종처럼 생겼다. 누구는 활짝 펼친 꽃무늬 양산 같다고 했지만, 나는 앙증맞은 꽃과 열매가 사랑하는 이의 귀에 매달렸다는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아래를 향한 꽃들이 엎어진 사기 종지 같기도 하다. 향기로운 소리가 쏟아질 것 같다. 봄과 여름 사이, 숲 냄새를 맡으며 나는 때죽나무를 ‘귀 많은 나무’라 부르기로 한다. 귀가 많다는 것은 남의 소리를 잘 듣는다는 것. 위를 향..

좋은 수필 2022.03.16

달을 새기다 / 김정화

달을 새기다 김정화 주인장이 기막히게 전을 구워낸다. 지인을 따라왔다가 알게 된 이곳은 애주가라면 지나는 길에 한잔 걸치기 딱 좋은 선술집이다. 집 근처에 있어 반가운 손님이라도 오면 저절로 찾게 되는 곳이다. 드문드문 들렀으나 한 번도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이 나는 참으로 편하다. 주로 말을 하는 직업이다 보니 술집에서조차 입을 다물고 싶은 심정을 헤아려 주기라도 하듯이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안줏거리 장만에만 손길이 바쁘다. 그러니 민얼굴에 보풀진 스웨터만 걸쳐도 민망치 아니하고 누구와 가든 무슨 대화를 나누든 눈치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면 딱히 튀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내 외양이 무척 다행이라 여겨본다. 나 또한 기억력이 흐릿하고 눈썰미가 신통찮다. 사람이나 물고기나 나무의 생김새를 들여다..

좋은 수필 2022.03.16

시간은 어떻게 껍질을 벗는가 / 최민자

시간은 어떻게 껍질을 벗는가 최민자 비닐하우스 위로 운석이 떨어졌다. 장갑을 낀 지질학자 몇이 수상한 돌덩이를 조심스레 거둬 갔다. 극지연구소의 분석 결과 그날 진주에 떨어진 두 개의 암석은 별에서 온 게 확실하다 했다. '별에서 온 그대'는 하늘의 로또라, 부르는 게 값일 만큼 귀하신 몸이어서 뉴스를 접한 사람들마다 자다가 떡 얻어먹은 하우스 주인을 대박이 터졌다며 부러워했다. 올여름, 나도 대박을 터트렸다. 내 집에도 별 그대가 당도한 것이다. 친견 일자를 통보받고부터 내도록 가슴을 설레며 기다렸다. 어느 별에선가 성운에선가 새로 출시되어 배송되어 온 특허품은 엄정하게 말하면 '메이드 인 헤븐' OEM인 셈이다. 3년 전쯤 지구별 모퉁이에 M&A로 설립된 합작공장에서 처녀 생산된 하청품인 바, 식구들..

좋은 수필 2022.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