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발표작

농다리에서 만난 피에타

이승애 2020. 1. 15. 23:07

농다리에서 만난 피에타

이승애

세금천을 둘러싼 산자락이 농염한 여인처럼 한껏 무르익어간다. 산발치에 흐르는 물줄기는 왜 그리도 바삐 가는지.

오늘도 농다리는 오가는 이의 촬영장이 되어 활기가 넘친다. 우리도 은근슬쩍 그 대열에 끼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사람과 자연이 지네 형상의 다리와 오묘하게 어우러져 또 하나의 그림이 된다.

초롱길에서 만난 가을은 더 깊고 아름답다.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케케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씻겨나간다. 나뭇잎 하나가 상념에 젖은 내 어깨를 슬쩍 스치고 떨어진다. 나뭇잎 색깔이 매혹적이다. 허리를 굽혀 주워 든다. 아뿔싸! 아름다운 색깔과는 달리 벌레에게 먹힌 상처가 애처롭다. 화려하게 물든 나뭇잎들을 살펴본다. 어느 것 하나 성한 게 없다. 벌레에게 먹히고 비바람에 찢긴 나뭇잎들이 아롱다롱 매달려 그네를 탄다. 그들은 이따위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꿋꿋하다. 왜 아프지 않았을까, 제 살을 베이고 뜯길 때마다 더 열심히 햇빛을 새겨 넣으며 살과 피를 만들었을 터. 어미는 상처 입은 나뭇잎을 보듬어 안고 도닥도닥 힘을 주었겠지.

막새바람이 불자 잠잠하던 나뭇잎이 너나 할 것 없이 너울춤을 준다. 그 모습이 함치르르하다. 축 늘어졌던 내 어깨도 슬며시 올라가고 흔들리던 마음이 단단해진다. 지금 내 시련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지나가지 않겠는가. 나도 꿋꿋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이 나뭇잎들처럼 곱게 물이 들고 아름답게 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와 농다리를 건너는데 반대편에서 오던 장애우 한 분이 폭이 좁아진 다리 앞에서 잔뜩 겁을 먹고 쩔쩔맨다. 앞서던 일행이 뒤돌아서 손을 내밀고 뒤에서 오던 사람이 그를 감싸 안는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 탓일까. 두려움에 젖었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안정을 찾더니 드디어 발이 앞으로 나가고 조금씩 나아간다.

그가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한쪽으로 물러나 기다리는 동안 다리를 본다.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긴 세월 버텨온 다리가 장엄하다. 냉랭히 흐르는 물에 저항하며 윗돌을 바치고 있는 아랫돌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다. 묵묵히 위를 떠받들고 있는 돌의 단단한 근육이 근중하다. 윗돌은 옹기종기 모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머리를 맞대고 있다. 물과 돌은 이렇게 어우렁더우렁 어울려 세월을 굴리고 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눈동자가 등잔만 해졌다. 큰 돌 속에 아롱다롱 박힌 조약돌들이 현현하다. 본래의 몸체는 사라졌으나 생생하게 남아있는 형상들. 언제부터였을까, 서로서로 품은 것이. 새로운 발견에 가슴이 콩콩 뛰었다. 장인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자고 해도 저리 연출할 수는 없다.

나는 재빠르게 주변 돌들을 스캔해 나갔다. 여기저기 돌을 품고 있는 돌들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떠오르게 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를 품에 안으신 마리아의 얼굴은 비탄에 젖어있지만 평온하다. 부당하게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절규하며 오열을 토해내야 마땅하다. 하지만 마리아는 깊은 침묵 속에서 아들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고 그 모든 것을 수용한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갑자기 떠안게 된 가장이라는 굴레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 가슴에 수만 가지 물음표가 일었다. 저항과 순응 사이를 오가며 잠 못 이루는 밤이 수없이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십자가라는 알게 되었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지금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

다시 돌아서 돌을 본다. 돌들의 은은한 빛이 나를 적셔 온다. 불현듯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졌다. 어머니가 패혈증을 앓고 나시더니 기억 회로에 문제가 생겼다. 온종일 기도하고, 책 읽고, 한자를 쓰며 자신을 가꾸던 일상 대신 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하였다. 잠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신지 울면서 나를 애타게 부르며 찾았다.

어제는 어머니가 애타게 찾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흘려버렸더니 그예 병이 나고 말았다. 끙끙 앓으시는 어머니 곁에 앉아 팔다리를 주무르는데 금방 바스러질 것 같이 앙상하였다. 어머니 입에선 연신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머니가 나를 키울 때 얼마나 애지중지하였던가. 유독 병치레가 많았던 나는 어머니 품속에서 살았다.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의 아픔에 깊이 동참하지 않았다. 조금 달라졌다고, 성가시게 한다고 피하고 짜증을 부렸다.

어머니가 잠꼬대처럼 나를 찾았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는 어릴 적 어머니가 그랬듯 꼭 껴안았다. 아가다 성녀가 하느님을 사랑하여 고통과 죽음을 선택했듯 나는 어머니를 선택했다.

건너온 다리를 처음인 양 다시 건너가 본다. 깊고 따뜻한 돌의 언어가 가슴을 파고든다. 미켈란젤로가 시공을 넘어 울림을 주는 피에타가 거기 있다.

 

한국수필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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