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발표작

기억, 그것은 믿을 것이 못 돼

이승애 2020. 3. 6. 22:08

기억, 그것은 믿을 것이 못 돼

 

이승애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틀림없다'는 확신에 찬 어투에 내 기억은 엿가락 꼬이듯 우왕좌왕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열 일 제치고 서랍과 책상, 책꽂이, 하물며 쓰레기통까지 뒤지며 영수증을 찾았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밤새워 뒤척이며 영수증을 건네 준 기억을 찾아내려 했지만 기억의 회로는 작동을 멈춘 것 같았다. 어찌해야 할지 뾰족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얄궂었다. 모면할 방법이 없자 간사한 마음과 비굴한 마음이 동시에 생겨났다. 시치미를 뚝 떼고 버텨보기로 했다.

그녀로부터 메시가 왔다. "영수증은 찾았나요? 계좌이체 하려면 필요한데." 도둑놈이 제 발 저리다고 그 메시지에 가슴이 뜨끔했다. 나는 아직 내 무책임함을 상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며 이번에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미적댔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아무리 바쁘게 일을 해도 똥 싸고 뭉그적거리는 것처럼 불편하고 꺼림칙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상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태도는 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이기 위해선 공손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아니. 적당한 유머 감각과 상대를 녹일 수 있는 감언이설도 필요하겠다. 생각은 이랬지만 정리되지 않은 말이 콩콩 튀어나가 그녀에게 전해졌다. 예상치 않은 말에 그녀는 당황하더니 금세 사무적인 어투로 바뀌었다. "문학회 동인지 발송 비용인데 그럴 순 없지요."라며 단호하게 말하면서 다시 찾아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내 방식대로 쉽게 해결하려고 했던 의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애면글면하다 문득 영수증을 재발급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났다.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아둔하여 끙끙 앓은 것이다. 나는 곧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우편물 담당 직원은 내 고민의 부피와는 다르게 아주 간단하게 영수증을 재발급해 주었다. 나는 우체국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녀에게 영수증 사진을 전송했다.

얼마 후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죄송해요. 우연히 정말 우연히 영수증을 찾았어요.”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때야 하얗게 지워졌던 기억이 마술처럼 살아났다. 문학회 세미나가 있던 날 영수증을 그녀에게 건네주었었다. 그동안 가슴앓이 했던 걸 생각하면 원망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기쁨이 먼저 앞섰다. 실추됐던 내 자존심이 살아난 것처럼 어깨가 으쓱했다.

찾지 못한 한 장의 영수증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며칠 동안 머릿속에 남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기억은 각자 다르게 저장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었음에도 그녀와 내가 다른 기억을 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오해가 생겼고 웃지 못할 상황까지 가고 말았다. 살아난 내 기억은 기고만장했지만 잘못 저장된 그녀의 기억은 낭패를 보았다.

그녀가 영수증을 발견한 순간 얼마나 많이 고민을 했을까. 아마도 두 마음이 충돌하였으리라. 시치미를 뚝 떼고 현재 상황을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솔직하게 말할 것인가. 충돌하는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솔직하기로 하였으리라. 나도 얼마 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니께서 군청에 제출할 서류를 발급받아 오라며 인감도장을 건네주셨다. 바쁜 일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어머니의 독촉에 서류를 발급받으러 갔다.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도장을 꺼내려는데 보이질 않았다. 가방에 있는 내용물을 몽땅 꺼내놓고 훌렁 뒤집어 탈탈 털어도 도장은 감쪽같이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궁지에 몰리니 기억은 고장 난 시곗바늘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급기야 어머니로부터 도장을 받지 않았다는 확신까지 생겼다.

허탕을 치고 돌아온 나는 어머니께 도장을 주지 않아 서류를 발급받아 오지 못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어머니는 분명히 주었으니 찾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가방을 열어젖히며 찾아보라고 내밀었다. 어머니는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본 듯 네가 건사를 잘 못 해 놓고 왜 나에게 핑계를 대냐며 역정을 내셨다. 우리는 서로를 불신하는 사태까지 가고야 말았다.

다음 날 아침 가방을 바꿔 들고 출근을 했다. 손수건을 꺼내려는데 무언가 툭 떨어졌다. 도장이었다. 머릿속이 서늘해지고 가슴이 방망이질해댔다. 어머니에게 고백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두 마음이 평행선을 긋다 내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심기가 불편한 어머니보다 내 자존심이 더 중요했던 나는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며 어머니의 동태를 살폈다. 딸에게 배신당한 어머니의 입맛은 뚝 떨어져 있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기에 찼던 어머니의 얼굴이 부드러워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제야 막혔던 구들이 뚫리듯 어머니와 나 사이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렇듯 기억은 그가 어떤 의식을 갖고 인지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저장된다. 그러니 기억은 얼마나 자기적인가. 특히 잊고 싶거나 불리한 기억은 쉽게 왜곡되고 변질하기도 한다. 그녀의 착각으로 빚어진 한 장의 영수증 사건은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라 나를 일깨우는 하나의 발판이 되었다. 그녀 또한 이 경험으로 자존심은 조금 상했겠지만 또 다른 것을 얻는 기회가 되었으리라.

 


수필과비평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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