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나무밭에서
이승애
산천초목이 향유를 바른 듯 곱다. 이제 친구와 나는 초록을 빌미로 곧 산과 들을 누비며 교감이 더욱 더 깊어질 것이다.
드디어 봄기운을 주체하지 못한 친구로부터 호출이 왔다. 우리는 좌구산 기슭에 위치한 친구네 배나무밭으로 향하였다. 첩첩 산 중턱으로 들어설수록 더욱더 싱그러워지는 초록의 물결이 우리의 마음을 한껏 부풀린다. 그러나 막상 배나무밭에 도착한 우리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칡넝쿨을 보자 양지바른 산자락에 앉아 낭창거리며 산나물도 뜯고 초록빛에 젖어 신선놀음이나 하려던 꿈이 북 찢겨 나간다.
우후죽순으로 자란 불청객들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 무대 한가운데를 장악하곤 우쭐우쭐 뽐을 내는데 한창 위상을 떨쳐야 할 배나무는 그들의 억센 손에 붙들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연히 서 있다. 그 모습이 남의 인생이야 어찌 되든 말든 내 욕심만 채우면 된다는 모리배를 닮았다. 보란 듯이 세력을 키워버린 이들 앞에서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며 농막에서 삽과 괭이, 낫이며 톱을 챙겨 들었다.
서둘러 놈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힘이 더욱 강해져 배나무의 숨통을 조여 올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사방팔방 세력을 뻗쳐 나가는 잡초며 칡뿌리를 캐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으로 높이 치솟아 올랐다. 땀으로 뒤범벅된 몸은 점점 지쳐갔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밭 한가운데 기세 좋게 배나무를 타고 올라간 칡넝쿨이 우리를 조롱하듯 쳐다본다. 그 모습이 밉광스러워 칡넝쿨 허리에 낫을 들이댔다. 우쭐대던 칡이 단숨에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내 이놈을 결단코 사달을 내리라.’ 옹골지게 삽을 집어 들고 땅을 파헤쳤다. 땀방울이 줄줄 흘러 눈으로 들어가 따끔거렸다. 무릎을 땅에 단단히 고정하고 전투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 파낸 흙이 두둑하게 쌓여갔지만, 칡뿌리는 쉽게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준비해간 얼음물이 바닥을 보일 때쯤 뒤엉킨 뿌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나무와 칡이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한 듯싶었다.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악처럼….
꽈배기처럼 꼬인 뿌리 중 칡뿌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 골라 잘라냈다. 그러나 그것은 배나무뿌리였다. 빗나간 선택, 우리가 옳다고 판단하는 것은 얼마나 자기적인가. 선과 악 사이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실수와 잘못도 이러할 터. 우리는 좀 더 신중을 기했다. 무조건 톱을 들이대지 말고 굵직한 뿌리를 따라 파 내려가기로 했다. 돌들이 시비를 걸듯 막아서는 통에 삽이 부러지고 서툰 괭이질에 상처 입은 뿌리들이 너덜거렸다. 이러다 배나무까지 죽게 하는 게 아닌가 하여 겁이 났지만, 칡을 그대로 둔다면 놈은 점점 세력을 키워 끝내 배나무를 고사시키고 말 것이다. 비록 배나무에 상처를 입히더라도 지금 없애야 한다. 얼마나 많이 보아 왔던가. 아주 작은 세력도 확장되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괭이를 잡아들었다. 악의 근거지인 뿌리를 뽑기 위해 사력을 다해 땅을 파헤치자 장딴지처럼 오동통한 뿌리가 체념한 듯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굵직한 근육에 톱질을 해댔다. 악착같이 배나무 뿌리를 옭아맸던 칡뿌리가 드디어 처참하게 널브러졌다. 묘한 쾌감이 솟구쳤다. 오래 묵은 체증이 가시는 듯했다. 하지만 무자비하게 잘리고 뽑힌 칡뿌리가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부분적으로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배나무의 영양분을 빼앗아 먹었던 칡도 완전체가 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계다. 칡은 앞뒤 가리지 않고 제 영토 늘리기에만 급급했지 자신을 돌아볼 줄 몰랐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칡은 약용으로 쓰이는 유익한 식물이 아니던가. 숙취를 해소하고, 갱년기 여성의 증상을 완화하며, 고혈압, 당뇨 등 좋은 약성을 가진 유익한 약용식물이다. 아마 이 칡이 이곳 배나무밭이 아닌 산이나 들에 제자리를 찾아 뿌리를 내렸더라면 그렇게 매몰차게 잘려 나가지는 않았으리라. 아니 오히려 좋은 약재라고 소중히 대접받지 않았겠는가. 아무리 좋은 약재라도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자라는지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진다. 배나무밭을 침범한 칡은 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의미없는 허망한 죽음의 자리가 되고 말았다.
사람살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진실이 묻히고 왜곡되는 아수라의 현장을 늘 보아오지 않았는가. 나 또한 남의 영역을 넘보는 못난 행위를 한 적이 있으리라. 그동안 외형만 불리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한 마음 한구석이 칡뿌리처럼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행여 비명을 지르는 배나무 위에 군림하는 칡넝쿨은 아니어도 그 근성으로 알게 모르게 상대의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있으리라.
치열한 격전 끝에 얻은 승리이지만 마음이 씁쓸하다. 지쳐버린 우리 곁으로 산그늘이 슬며시 내려와 앉는다. 바람이 덩달아 땀을 훔치고 지나간다.
오늘은 산중 배나무밭에서 사는 법을 다시 배운다.
칡의 주검을 수습해 내려오는데 자꾸만 가슴이 뻐근해진다.
한국수필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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