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푸른 생명으로 가득한 오월이었다. 눈부시도록 고운 이 계절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건장하던 팔 한쪽이 부러지고 말았다. 기둥만큼 퉁퉁 부은 팔은 애물단지가 되어 누워도 성가시고 앉아도 불편하니 구십을 앞둔 어머니를 감히 내 시종으로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머니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구부정한 몸으로 동분서주하셨다. 하루는 허약해진 딸을 가엾이 여기셨는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시장에 손수 가시어 닭 한 마리 사와서는 갖은 정성을 다해 백숙을 만드셨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맛을 즐기려니 문득 30여 년 전에 있었던 웃지 못할 사건이 떠올랐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어서 옷 갈아입고 나오너라. 오늘 밤에 오빠들이 온다니 닭 한 마리 잡아먹자꾸나.”
서둘러 닭장에 들어갔지만, 날렵한 닭을 잡기란 쉽지가 않았다. 잡으려는 자와 잡히지 않으려는 자의 대결은 요란했다. 아무튼 20여 분 싸움 끝에 실하게 살이 오른 장닭을 움켜쥐었다. 푸드덕거리는 닭을 놓칠세라 두 손으로 잔뜩 움켜잡고 있는 사이 어머니는 펄펄 끓는 물을 내오셨다. 두 모녀는 어둠이 내린 뜰에서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놈의 저항에 우당탕탕 몇 번을 나둥그러지고 엉덩방아를 찧은 다음에야 녀석을 잡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리 어렵게 잡은 놈을 온갖 정성을 다해 솥에 안치시고는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마루에 걸터앉았다. 희미한 전등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깡말라 볼품은 없었지만,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 가득 차 천사 같은 아름다움이 풍겨 나왔다. 그날 밤 우리 가족은 돈독한 사랑을 나누며 맛있는 닭요리를 먹었다. 그 이후 심심하면
“닭 한 마리 잡을까요?”
어머닌 펄쩍 뛰시며 손사래를 치곤하셨다.
어머니의 손맛이 조금 달라지긴 했어도 자식에 대한 사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 늘 집안에서만 생활하시는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시장에 다녀오신 것은 위대한 모성 본능이었다. 며칠 전에는 텔레비전에서 보셨다며 소고기부추샐러드 요리법을 적어주셨다. 삐뚤빼뚤 엉성한 글씨 속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 다른 노인들은 그 연세쯤 되면 남에게 의존하려는 마음이 증가한다는데 나의 어머닌 아직도 보호자의 역할을 내려놓지 못하신다. 당당하고 떳떳한 어머니 때문에 오늘도 희희낙락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그렇다고 매일 호호하하 할 수는 없는 터 가끔은 불꽃이 튀기도 한다. 어느 날은 엄벙덤벙대다 쌍으로 실수를 저지르는가 하면,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팽팽한 줄 달리기를 한다. 그러다가도 일이 잘 풀리면 우리 둘이 판단을 잘해서 그렇다고 좋아하곤 한다. 이렇게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우쭐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모독이요 주제넘은 오만이다.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히 국보감이라 할 만큼 그 크기나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사랑의 뒷받침으로 나는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배우기도 한다. 올해엔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글공부도 시작하였다. 간혹 써 두었던 글을 읽어 드렸더니
“너는 어쩜 그리도 감수성이 뛰어나니. 내 딸이지만 참 멋지다.”
과한 칭찬이었지만, 주춤거리며 망설이던 나의 가슴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보석이 되어 가슴에 박히곤 한다. 책임감은 또 얼마나 강하신지 어떤 일을 부탁이라도 할라치면 당신 몸 부서지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는 키우던 물고기 상태가 좋지 않아 잘 관찰하시라고 부탁드렸더니 꼼짝하지 않고 다섯 시간 동안 지켜보셨단다. 그러면서 무릎이 아프다고 끙끙 앓으신다. 죄스런 마음에 왜 그렇게 미련을 떨었느냐고 역정 아닌 역정을 내니
“네가 부탁했는데 들어주어야 할 것 같았단다.”
환히 웃으시는 어머니께 웃을 수도 없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 무릎만 주무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참으로 신비롭고 오묘한 빛깔을 가진다. 한없이 편하고 따뜻한 애정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너무 가까워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웃고, 말하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오늘도 어머니와 난 한 지체가 되어 웃고, 이야기하며 따뜻한 정을 나누는 모녀로, 벗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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