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창작수필(신호등)

어머니와 영화관엘 가다

이승애 2015. 1. 7. 22:08

어머니와 영화관엘 가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자 맑은 햇살이 방안을 파고든다. 잠자던 바이올렛과 난초들이 기지개를 켜듯 포르르 떤다. 빛은 방안에 갇혀 있던 사물을 깨우고 공중에 떠 있는 먼지까지 통과한다. 그 화사한 빛에 노출된 어머니의 야윈 몸은 울컥 슬픔을 자아낸다. 구부러지고 휜 다리, 걸을 때마다 쿵쿵 비명을 지르는 그 무게의 힘겨움을 애써 외면하려는데 어머니께선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웃으신다. 지금은 이렇게 노쇠하여 몸의 무게마저 감당하기 어렵지만 멋진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날도 오늘같이 황홀한 햇살이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었다. 마당 가득 피어오른 꽃들은 아름다움을 뽐내며, 향기를 품어댔고, 산과 들녘은 온통 초록으로 가득 찼다. 어머니께선 평소보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고운 옷으로 갈아입으신 후 나까지 곱게 단장을 시켰다. 아버지께서 꼴 베러 들로 나가시자 어머니께선 내 손을 이끌고 버스에 오르셨다. 장안을 돌며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신 어머니께선 서둘러 장뜰 안에 있는 유일한 문화공간, 증평극장 앞에 섰다. 건물 정면엔 영화의 한 장면을 그려놓고 붉은 글씨로 꼬마 신랑이라고 적어 놓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엄마! 영화 보실 거예요?”

그래 너랑 영화를 보려고 왔단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어머니는 몇 번 와 보신 듯 능숙하게 매표소로 향하였다. 입장권을 파시던 아주머니께서는 어머니께 반가운 인사를 한 뒤 , 꼬마도 왔구나.” 하시며 벌떡 일어나 객석까지 안내해 주었다. 건물 안은 꽤 어두웠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온몸에 배는 듯했다. 이미 객석은 관람객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은 흥분된 어조로 떠들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도 몹시 상기되어 큰소리를 지르며 이야기를 하였다. 관계자가 아무리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시켰지만, 웅성거림은 계속되었다. 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시작을 알리자 촤르르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영상이 올려졌다. 전국 유명한 영화관을 돌아온 영화 필름은 수없이 재탕되어 비 오듯 지직거리고 흔들렸지만, 관람객들은 숨을 죽이고 화면을 응시하였다. 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 화면에선 뉴스의 형식으로 박정희 대통령 내외 활동, 서울 풍경, 동물원 소식, 유명 연예인과 더불어 베트남에서 활약 중인 우리나라 군인들의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 내용은 시대극으로 스무 살 안팎 처녀가 일곱 살 꼬마에게 시집을 가면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건, 사고와 이복누이의 계략으로 누명을 쓰게 되어 친정으로 쫓겨났다가 되돌아와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이었다.

상영되는 내내 어머니와 나는 울고, 웃기를 반복하였다. 영화는 선명했다가 흐렸다가 비가 오는듯한 현상이 있는가 하면, 필름이 두어 번 끊기는 경우가 있었지만, 처음 영화를 보는 나에겐 모든 것이 즐겁기만 하였다. 아직 텔레비전이 보급되지 않은 시기이라 영화관 체험은 나에게 엄청난 자랑거리요,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 비밀이 오래가진 못하였다. 영화를 본 다음 날 어머니의 눈이 충혈되고, 부풀어 올라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당신 몰래 영화관을 다녀온 모녀가 우스운지 며칠을 놀려 대었다. 그 이후에도 어머니를 따라 영화관을 다녀왔고, 다녀올 때마다 친구들에게 뻐기며 자랑을 하곤 하였다.

어머니께서 영화관을 찾으신 것은 고달픈 삶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도시에서 문화생활을 즐기다 시골에서 궁핍하게 살아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갑작스레 변한 환경과 점점 무거워지는 생활의 무게를 안간힘을 다해 버티다 그 짐을 덜어내기 위한 수단이었으리라. 그래서 몸이 닳도록 일하시는 아버지껜 죄스럽지만, 영화 보기를 강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 영화는 잠시 즐거움을 주는 오락의 성격이 아니라, 소진한 에너지를 채워주고, 휘청거리는 삶을 지탱해주는 고임돌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온 천지가 초록으로 물드는 오월이 오면 어머니를 모시고 영화관엘 한 번 다녀오리라. 지금은 그 시절의 영화관을 체험할 수 없겠지만, 어머니의 젊은 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감미로운 추억은 즐길 수 있을 것이다.

 

 

201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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