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창작수필(아버지의 손)

어머니의 초상

이승애 2015. 3. 10. 22:52

어머니의 초상

 

이 승 애

 

어머니께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오래된 라디오 주파수 맞추는 소리처럼 칙칙 긁히는 숨소리를 내신다. 아버지와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름시름 심장병을 앓으시더니 온갖 합병증이 생겨 고통의 십자가를 을러 매셨다.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니 박속같이 하얗던 속은 시커멓게 삭았고, 나긋나긋하던 얼굴은 좌절과 절망감에 얼룩져 누렇게 타들어 간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좌불안석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밤 텔레비전을 보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갑자기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더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헐떡거리셨다. 금방 돌아가실 것 같아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응급처치를 하고 인근 병원으로 가는데 십분 거리가 한나절 걸리는 것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응급실 좁은 침대에 눕혀진 어머닌 마치 밀랍인형처럼 하얗게 질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도 초췌해진 딸의 모습이 안타까우셨는지 연신 어디에라도 앉아서 좀 쉬어라.” 라고 중얼거리셨다.

어둠이 짙은 새벽 응급실에서 조차 딸의 안위만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시린 눈빛과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딸의 절망적인 눈빛이 마주칠 때마다 두 모녀의 눈가는 빨갛게 달아올랐다. 밤새 수도 없이 행해진 검사와 처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은 채 이 의사에게서 저 의사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다음날 우여곡절 끝에 심혈관조영술을 시도하였다. 심혈관이 좁혀져 부득이 스탠트 삽입을 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시술이 진행되었고, 한 시간여 지나도록 수술 방에선 연락이 없었다.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가슴을 어찌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좌불안석인데 핼쓱해진 의사가 나오더니 긴장된 어조로 말하였다.

시술 도중 자꾸만 심장이 멈춰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습니다. 일주일간 입원하신 후 다시 시도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의 정중한 태도 뒷면엔 본인의 의술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실려 있었다.

병실로 옮겨진 어머니는 일주일간 약물 치료를 하며 심신의 기력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길고 긴 일주일의 투쟁을 마치고 또다시 심혈관조영술을 위해 넓적다리에 관을 삽입하였을 땐 다른 진단이 나왔다. 혈관이 좁혀진 것이 아니라 심장기능이 극도로 약화돼 심박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뜻밖의 상황에 의료진도 가족도 새로운 진로를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의사는 연세가 연로해 조심스럽긴 하지만 인공심장박동기 삽입을 하면 위험을 모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어머니는 더 이상 치료를 원치 않는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이만큼 살았으면 됐지 억지로 생명을 연장한다고 자식 등골 빼먹지 않겠다.” 고 단호한 태도로 맞섰다. 며칠 동안 눈물어린 실랑이가 벌어졌고, 어머닌 체념하듯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셨다. 지금은 어머니 왼쪽가슴 상단에 자리 잡은 손바닥만 한 기계에 의지하고 살고 계신다.

어머니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이셨던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자 큰외삼촌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어머닌 황해도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십여 년 동안 객지를 떠돌며 공부를 하시던 어머닌 해방이 되자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셨다. 새가정을 꾸리고 가족과  다복한 생활을 이어가던 어머니께 또 한 번의 고통이 찾아왔다.  6.25 전쟁으로 순식간에 부모님과 형제를 잃고 말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곧 통일이 되리라 믿었던 기대와는 반대로 남북의 벽은 더욱 높아져 가족 상봉의 꿈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어머닌 잃어버린 부모 형제의 빈자리를 채우기라도 하듯 매사에 적극적으로 행동하셨다. 농촌의 젊은 아낙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는가 하면 갖가지 음식 만드는 법과 꽃 가꾸는 일을 가르치시곤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쯤엔 시골학교를 혁신하고자 하셨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밴드부를 만드는 것이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골마을에서 감히 듣도 보도 못한 악기를 사들여 아이들에게 헛바람을 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들조차도 반대하고 나서니 어머니의 꿈은 좌절의 위기에 몰렸다. 그렇다고 물러설 분이 아니었다. 몇 차례 선생님을 만나 설득하고 학부모에게 손수 동의서를 얻기 위해 매일 십여 리 길을 오가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도시물 먹고 학식이 높다고 하여 시골터줏대감들이 동의서에 척척 도장을 찍어 줄 리는 만무했다. 이해부족으로 심한 욕을 얻어먹기도 하고 사기꾼 대우를 받아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밴드부가 결성되었다.

어머니의 이 뜨거운 열정은 이름을 내기 위해서라든가 개인의 욕심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난하고 헐벗고 살아도 아이들만큼은 꿈을 갖고 살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시골 작은 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악기 소리는 세상을 향한 외침이요, 희망의 연주곡이었다. 우리들은 그렇게 고군분투하면서 성장해갔다.

지금은 윤기 잃은 얼굴로 누웠다 앉았다 하시며 병마와 싸우시지만, 한 때는 희망의 전령사로 투혼을 불사르던 어머니였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새벽 4시만 되면 벌떡 일어나 자녀를 위해, 이웃과 험한 세상을 위해 기도를 하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삶은 세상과 천상을 잇는 징검다리이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겨워도 손을 거두지 않으시는 우리 어머니, 그 가슴엔 아직도 뜨거운 열정이 넘실거린다. 난 그런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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