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이 승 애
녹음 짙은 산길을 걸어 양지바른 곳, 언니 누우신 무덤에 무릎을 꿇고 안부 인사 올린다. 그동안 푸르게 자란 잔디는 언니인 듯 반갑게 맞이한다. 살아생전 가족, 이웃에게 자양분이 되었듯이 이곳에서도 곱게 누워 당신 몸을 아낌없이 자연에 내어주는 그 넉넉함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언니가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어느새 14년이 되었다. 큰 어려움 다 겪어내고 제2의 삶을 꿈꾸던 시기에 광풍처럼 들이닥친 불의의 교통사고는 모든 것을 뒤바꿔버렸다. 언니는 2남 2녀 중 귀한 맏딸로 태어났지만,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홀로 청주에서 자취하며 학교에 다녔다. 형편이 어려우니 손바닥만 한 자취방을 구해 생활하였는데 그마저 편히 살지 못하였다. 연탄을 아끼려고 냉방에서 생활을 하는가 하면 끼니를 거르며 생활비를 아꼈다. 부모님의 손길이 닿지 않으니 겨울이면 손발이 얼어 고통스러워하였고, 쥐와 벌레가 수시로 드나드는 허술한 자취방의 불편함을 말없이 견디어냈다. 그러면서도 부모님께는 늘 밝고 의젓한 모습으로 맏이의 본분을 다하였다.
의사가 되고 싶어 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학교에서 새로운 꿈을 펼치던 언니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20대 초반에 가장이 되었다. 어린 동생들의 학비와 아버지께서 미처 갚지 못한 빚은 족쇄처럼 언니를 조였다.
꿈조차 꿀 수 없는 희생의 길을 가면서도 운명처럼 받아들인 숭고한 정신의 푸른 산맥, 그곳엔 외롭고 고통스러운 슬픔의 골짜기가 있었고, 어머니가 의지할 수 있는 바위가 있었다. 그리고 동생들이 잘 자랄 수 있는 부드러운 토양과 힘들 때 쉬어갈 수 있는 나무도 있었다. 우리는 그 순수한 산에 자연스럽게 깃들어 안정을 찾아갔다.
우리는 언니의 희생과 사랑으로 학업을 마치고 각자의 삶을 찾아 나섰고, 언니도 그동안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았지만, 허리가 잘못되어 두 번의 수술을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수술 결과가 신통치 않아 교직을 떠나야 했다. 몇 년 동안 눈물로 보내던 언니가 조금씩 회복의 기미를 보이더니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학원 강사로 활동하게 된 언니는 활기차고 행복해 보였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이웃에 사는 장애인과 불우한 이웃을 찾아다니며 봉사도 하고, 이것저것 배우기도 하였다.
그런 생활이 삼년도 되지 않아 변을 당한 것이다. 집 근방 은행에 다녀오다 택시기사의 실수로 언니의 자전거를 덮치고 말았다. 가까스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술을 지체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응급실의 작은 침대에 홀로 누워있는 동안 터져 버린 뇌혈관에선 쉴 새 없이 피가 흘러 나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내가 달려갔을 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얼굴과 몸이 처연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언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들이치락내치락 종잡을 수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을 떠나지 못하였다. 오랜 시간 생사를 넘나들며 애간장을 태우더니 어느 날 조금 나아진 듯했다. 반가운 마음에 음악도 틀어주고, 머리도 깎아주었다. 하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고열이 나고 상태가 나빠졌다. 조그만 몸에 또 하나의 기계와 링거 숫자가 늘어났다. 온몸 구석구석에 얼음주머니를 끼워놓아 언니는 경련을 일으키듯 떨었다. 좁아진 기도는 쇳소리를 내며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몇 달째 반복되는 언니의 상태. 절망과 희망이 뒤치락엎치락 우리 가슴에 깊은 골을 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기력을 잃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셨다. 하루 세 번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었지만, 상태가 악화되자 병원에선 아예 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온종일 주무르고 닦아주고 이야기하면서 힘을 북돋아 주었지만, 사경을 헤매는 언니는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그러기를 한 달 가까이 지속되다 조금 나아진 듯하여 모처럼 병원을 나섰다.
그동안 밀린 일들이 산더미 같아 서둘러 일을 하는데 병원에서 호출이 왔다. 좀 더 큰 병원에 가서 기도 넓히는 수술을 하고 와야 한단다. 긴급히 이송하여 수술을 시도하였지만, 수술 불가능판정을 받고 되돌아오니 언니 상태는 더욱 악화하였다. 움직이지 못하고 오래 누워 있으니 부드럽던 몸은 뻣뻣이 굳어 편한 체위로 변경하기도 어려웠다. 언니는 꼼짝할 수 없는 자신의 고통을 눈물로 표현할 뿐이었다. 여섯 차례의 어려운 수술도 아무 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언니의 풍요롭던 산은 뚝뚝 무너져 내렸다. 척박한 돌산으로 변한 언니의 땅은 슬픔과 고통의 흙먼지를 날렸다.
1998년 5월 19일 언니의 생일이었다. 눈조차 뜰 수 없는 언니는 가느다랗게 쉬던 숨마저 힘겨운지 자꾸만 멈추었다. 서둘러 가족들이 모여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중 언니는 조용히 하늘나라로 향하였다. 삼백십일 숨 가쁘게 오르내리던 산타기는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언니는 또 다른 사람의 산이 되기 위해 평생 빛이 되었던 눈을 남겨주었다.
지금은 다른 이의 눈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언니가 그리워진다. 각막을 받은 그도 언니가 그랬듯이 넉넉한 산이 되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휴식처도 되고 의지도 되었으면 한다. 또한, 그 사람 자신도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비록 언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아직도 우리 가족에겐 산으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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