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2015년 창작수필

숨은 꽃

이승애 2015. 6. 28. 23:28

숨은 꽃

 

이 승 애

 

강원도 인적 드문 첩첩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수녀님을 찾아뵙기로 하였다. 정선시장에 들러 이것저것 사 들고 도착하니 수녀님께선 이미 동네 어귀에 나와 계셨다. 꼬불꼬불한 돌길을 한참을 들어가니 가파른 산 중턱에 허술한 집 한 채가 반가운 듯 맞이한다.

집안에 들어서니 외양과는 달리 소박하면서도 정갈하다. 누구의 도움 없이 손수 지은 집이어서 제대로 틀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과는 달리 안채엔 현대식 싱크대와 화장실이 번듯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허술한 움막치고는 꽤 괜찮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게 아니란다. 그것은 주인의 안락한 생활을 돕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간혹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마련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일반적인 사고를 깬 수녀님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산중에서조차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참으로 곱게 느껴진다.

집은 일자형 형태로 지었으나 내부 구조는 보통 집과 달랐다. 수녀님의 일상을 돕는 부엌은 마루와 안방 사이에 한 자쯤 파 내려가 요새처럼 꾸몄다. 여느 부엌에서는 볼 수 없는 안락함이 느껴졌다. 마당 곳곳엔 채소와 약초, 야생화,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햇살 가득 내려앉은 들마루엔 갖가지 약초와 산나물이 뽀송뽀송 말라가고, 마당 한 귀퉁이에 설치된 수도꼭지에서는 시원한 계곡 물이 쏟아져 나와 메마른 땅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이만한 곳이면 수녀님도 안심하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겠다 싶으면서도 굳이 이곳까지 오시게 된 경위가 궁금해 기어이 여쭙고 말았다. 그분은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속내를 드러내셨다. 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려고 하였지만 풍족한 생활에 길들여 조금씩 세속화되어가는 것이 두려웠단다. 몇 해를 두고 고민하다 교회 장상과 상의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셨다. 수녀님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수덕修德을 쌓으며 기도에 전념할 수 있어 행복하단다. 수녀님의 극기와 절제로 고통 받는 형제자매와 친교를 맺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보통 수도자들은 직접 찾아다니는 봉사를 한다면 수녀님은 깊은 침잠 속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수호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춥고 지난한 겨울엔 금육과 기도, 희생으로 내적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라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육체노동으로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는 시기란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 소출은 적지만 그 일부를 떼어 가난한 이웃과 나눌 수 있어 좋다며 웃으셨다. 얼마 전에는 누구라도 쉬어갈 수 있는 별채 하나도 지었다. 그 깊은 산중에 누가 올까 싶었는데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벌써 여러 사람이 다녀갔단다. 어느 땐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이 머물다 가기도 하고 어느 땐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이 다녀가기도 한단다. 비록 불편하고 보잘것없는 움막에 불과하지만 길 잃은 사람들이 조건 없이 다녀갈 수 있다니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희망의 근원지가 되리라 생각된다.

수녀님은 한때 명망 있는 삶을 살았지만, 그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에 머물지 않았다. 그 풍족함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고 모든 것을 과감히 떨쳐버리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지금은 빈손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계신다. 욕심을 잘라낸 수녀님의 모습은 지고지순하다. 들마루에서 고실고실 말라가는 산나물처럼 삶의 군더더기는 사라지고 오직 인간의 순수한 본질만 남은 듯 보였다. 꾸밈없는 수녀님의 미소에 내 안의 욕심들이 부끄러워진다. 수녀님의 빈손에서 자유를 본다. ‘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수녀님의 마음이 세상에 꽃을 피우고 있다.

수녀님은 먼 길 찾아온 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하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곤드레밥과 갖가지 산나물로 음식을 만드셨다. 청정지역에서 자란 산채 밥을 먹고 나니 절로 흥이 난다. 굽이쳐 흐르는 푸른 산맥에서 품어져 나오는 숨결처럼 수녀님의 아름다운 정신이 때 묻은 마음을 씻어내고 있다. 앞마당 곳곳에 자란 민들레가 시나브로 홀씨를 날리고 있다. 사랑이 민들레 홀씨가 되어 날고 있다.

 

 

2015. 3. 15

 

 

 2015년 충북수필문학 3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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