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2015년 창작수필

이별 그리고 만남

이승애 2015. 6. 28. 23:34

이별 그리고 만남

 

이 승 애

 

늙은 애마가 마지막 질주를 한다. 이별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 때문에 질척해진 도로를 온 힘을 다해 달린다. 헉헉대는 녀석을 축축하고 어둑한 곳에 놓고 이별을 고하고 돌아서는데 십여 년간 함께 했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녀석을 만난 곳은 서울 장안동 중고자동차시장에서였다. 청주에서 자동차 중고시장을 기웃대다 기어이 서울까지 행차하게 되었다. 딜러가 선보인 차 중에서 흔하지 않은 푸른색과 디자인, 편안한 내부 설계에 반하였다. 새로운 짝꿍이 된 청마는 그 푸른빛을 반짝이며 충성을 다하였다. 어느 날은 성정이 급한 주인 탓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리기도 하고 과한 노동으로 헉헉거리기도 하였다. 그중 가장 혁혁한 공로는 몇 년 전 어머니께서 쓰러지셨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온종일 쉴 새 없이 일하고 아파트 한구석에서 쉬고 있는 녀석을 다그쳐 길을 재촉하였다. 나의 청마는 주인의 다급한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있는 힘을 다해 달려주었다. 녀석의 헌신덕택에 어머니는 다행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충직했던 청마에게도 비운이 있었다. 모처럼 나선 가을 나들이 길에 신호를 위반한 자동차가 청마의 옆구리와 엉덩이를 들이받고 말았다. 청마는 문짝이 찌그러지고 바퀴가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안간힘을 다해 주인을 지켜주었다. 그 덕택에 어머니와 나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청마는 수리공장에서 하루 동안 집중치료를 받아야 했다.

몇 년이 지나자 멀쩡하게 보이던 녀석의 상처가 덧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새로 칠한 페인트 부분이 울퉁불퉁 부풀어 오르더니 조금씩 벗겨져 녹이 슬고 점차 부식되어 결국엔 살갗이 부서져 내렸다. 악성 부스럼처럼 번져가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의 근심은 더욱 커졌다. 자동차정비업소를 전전하며 고쳐볼까 했지만 늙고 병든 녀석을 수리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가련한 청마의 등에 오르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그럭저럭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자 녀석의 병세가 깊어졌다. 어느 땐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가 하면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뻑뻑하게 몸통을 흔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녀석과 헤어지기로 하였다. 바람 불고 눈이 내리던 날, 친구네 카센터에 세워놓고 돌아서려는데 차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다 돌아오니 친구 남편에게서 뜻하지 않은 소식이 전해져왔다. 낡고 병든 녀석이지만 아직 쓸모가 있어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단다. 동남아로 간다고 하였다. 성하지 않은 몸으로 먼 타국까지 간다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반갑지가 않았다. 녀석은 나와의 정을 잊지 못하고 백팔십 만원과 휘발유 한 통을 남겼다. 뜻밖의 선물을 받고 나니 녀석에게 더 미안해진다. 십 수 년간 나와 함께 하면서 여기저기 긁히고 다쳐도 불평 없이 잘 따라주더니 마지막으로 주머니까지 채워준 것이다.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청마에게서 봉사의 정신을 배운다. 나도 과연 삶의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살 수 있을까. 아니 세상을 하직하는 그 순간에 순순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을까. 사람이 청마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청마는 지금 나의 삶이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치는 듯하다.

청마와 이별을 고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듯 새로운 짝꿍을 찾아 나섰다. 며칠 고민 끝에 새로 탄생한 젊은 백마를 선택하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에 깔끔하고 독특한 디자인이 매력적이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청마를 잃은 슬픔이 금세 환해진다. 조심스럽게 녀석의 등에 오르자 내 마음을 아는지 온순하게 받아들였다. 살짝 엔진 버튼을 누르니 경쾌한 음을 내며 부드럽게 시동이 걸렸다.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올리자 질주의 본능을 드러냈다. 첫 출발이 기분 좋다.

인간과 사물의 만남,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매우 다양하지만 나와 조화를 이루기란 쉽지 않다. 아름다운 관계를 맺기 위해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서로에게 길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이제 백마와 멋진 관계를 맺기 위해선 서로에게 길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리라. 오늘도 남부럽지 않은 짝꿍이 되기 위해 나와 백마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2015년 무시천 5집 

 

 

'그룹명 > 2015년 창작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15.11.07
숨은 꽃  (0) 2015.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