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유혹에 빠지다
아직 남아 있는 겨울을 내몰기라도 하듯 포근한 햇살이 내려앉는다. 나는 곰살스런 봄의 유혹에 깃털처럼 가벼워져 산등성이로 내달았다. 산머리는 잔설이 남아 희끗희끗하지만, 나뭇가지는 연한 푸른빛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양지바른 곳엔 벌써 작은 생명이 뽀스락뽀스락 움트는 소리가 경쾌하다. 여기저기에선 산새들이 창공을 가르며 봄 햇살을 당기고 작은 벌레들도 꼼지락대며 때 이른 나들이에 나섰다.
새 생명이 잉태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이 오면 지병처럼 앓는 봄앓이. 겨우내 차분하게 눌러놓았던 감성이 폭죽처럼 터지며 온 집안을 불꽃놀이 판으로 만들어버린다. 올해도 그 행보는 계속되었다. 고요하던 집안이 바람 든 여자에 의해 부산해졌다. 봄기운에 서서히 달뜨기 시작한 가슴은 신묘한 에너지를 한곳으로 모아 요상한 재주를 부린다. 그것이 이상적인 방향으로 흐른다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엉뚱하게 배포만 커져 그동안 살갑게 옆에 두고 사용하던 물건들을 지지리 궁상으로 몰아버리는 못된 허영꾼이 된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껏 잘 입던 옷가지를 들고 나와 온갖 구실을 대며 타박하고 끝내는 더는 입을 수 없음을 명명한다. 봄볕 화사한 날 마음껏 퍼질러 앉아 요런 궁리나 하니 어머니의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려 한숨을 푹푹 쉬시다가는 기어이 가시 돋친 잔소리를 한 바가지 쏟아놓으셨다. 이제 곧 시장으로 달려가 이것저것 만용을 부리며 잔뜩 들여올 상황이니 어찌 가만히 계시겠는가. 그러나 이미 헛된 욕심으로 가득 찬 내 귀에 어머니의 따끔한 잔소리가 들어 올 리 만무하다. 방 한편엔 내 손에서 버려진 물건들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이별을 기다리고 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살랑살랑 꼬리 치는 봄바람에 넋이 나간 나는 겨울을 벗어버리고 싶어 안달을 내었다. 기어이 읍내로 뛰쳐나가 미장원을 기웃거리며 어정이다가는 봄냄새 물씬 풍기는 곳으로 뛰어 들어가 긴 머리를 댕강 자랐다. 그것으로 족했으면 좋으련만. 헤어디자이너의 간드러진 꼬임에 빠져 파마를 했는데 꼬불꼬불 영락없는 시골 할머니다. 거울을 보다 울상이 된 나에게 “어머, 너무 잘 나왔네요.” 하며 내 마음을 달랜다. 상술에 넘어간 심약한 의지를 탓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왜 하필이면 그 집에 갔느냐.’며 가슴을 친다. 봄은 그렇게 서툰 몸짓으로 시작되었고, 나의 뽀골뽀골 폴폴 날리는 풀솜 머리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묘한 웃음을 자아냈다. 난 더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다녔다. 머릿속은 주인의 어리석음을 나무라듯 반란을 일으켰다. 봄이 다 가도록 짓물러버린 피부는 성깔을 내려놓지 않았다.
봄은 이렇듯 환상의 몸짓으로 나를 유혹하고 변화를 꿈꾸게 한다. 봄이 가고 천천히 여름으로 접어들 때쯤이면 후회를 하지만 봄의 황홀한 유혹에 빠지곤 한다. 조금 더 봄이 깊어질 때면 매일 산속에 들어가 마음껏 자유를 꿈꾼다. 자연과 하나가 될 때면 세속적인 탐닉생활은 조용히 멈추고 맑고 깨끗한 순수의 존재로 정화되어 간다. 살벌하고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피폐해진 심성은 맑고 곱게 다듬어져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그뿐만 아니라 진실하고 솔직해져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가 변하고, 소중한 것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한다. 그러기에 나는 봄의 유혹을 즐기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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