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창작수필(신호등)

보탑사에서

이승애 2015. 1. 7. 22:50

보탑사에서

 

이 승 애

 

하늘과 땅이 맞닿은 아름다운 능선을 타고 푸름이 들끓는다. 짙푸른 숲의 유혹에 친구 몇몇이 꽃봉오리 같은 보련산에 들어 앉아 있는 보탑사로 향하였다. 굽은 길을 따라 가는 길, 숯가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참나무 타는 냄새가 구수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그곳을 조금 지나자 아스팔트길이 끝나는 지점엔 아름다운 연곡저수지가 물비늘을 일으키며 환영인사를 한다. 조붓한 오솔길 아래엔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청량감을 준다. 마지막 모퉁이를 휘돌아 언덕을 오르자 작은 마을이 나타났고, 아늑한 터에 보탑사가 둥지를 틀고 앉아 있었다.

보탑사 입구에 다다르니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어머니처럼 푸근하게 맞이한다. 오랜 연륜에도 불구하고 푸른 잎을 싱그럽게 흔드는 모습은 일상의 번뇌를 잊게 해준다. 그 그늘에 앉아 잠시 머무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세속의 때가 씻겨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아기자기한 정원에선 꽃향기와 솔향이 그윽하게 적셔온다. 마치 야생화식물원에 온 듯 경내 곳곳엔 수십여 종류의 야생화와 나무가 발길을 붙잡고 맑고 고운 이야기를 한다.

꽃들은 마치 비구니스님들의 삶을 반영하듯 요란하지도 요염하지도 않다. 허리를 굽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그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는 작은 꽃에게서 부처님의 자비를 읽는다. 둥근 옹기 화분에 곱게 심어진 데이지, 하늘매발톱, 금송화, 오색 바베나, 물망초 등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 동기동기 모여 앉아 하나를 이루는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난다. 대웅전 측면에 길게 누운 화단엔 꽃과 채소가 어우러져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지만 어색하거나 거슬리지 않는다.

나는 얼마나 많이 이유 없는 경계심과 의심을 하였던가. 조금만 낯설고 어긋나도 움츠러들고, 쉽게 적응하지도 조화를 이루지도 못하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진다. 작은 자극에도 까칠해지고, 의기소침해지는 탓에 며칠 전에도 낯선 이들과의 모임에서도 유쾌한 만남을 갖지 못하였다. 자연스럽게 이웃을 돕고, 부드럽고 정다운 말씨, 낯선 사람에게도 너그럽고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일이야말로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작고 예쁜 꽃들이 다가와 부실한 내 일상의 찌꺼기를 소리 없이 쓸어간다. 묵은 것과 굳어진 것에서 거듭거듭 떨치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가만히 친구의 손을 잡는다. 영문을 모르는 친구는 잡힌 손에 힘을 주어 함께하는 기쁨의 마음을 전한다.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스님들의 섬세하고 따뜻한 사랑이 느껴져 우리의 마음은 서두름이 없다. 작은 연못엔 수련과 연꽃이 해맑다. 그 모습이 마치 스님을 닮은 듯하여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들꽃과 멋들어진 밀어를 마칠 즈음 정갈한 감로수로 목을 축이니 가슴은 하늘빛으로 물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 다녀가는 곳이지만 상처받은 흔적 없이 정갈한 것은 스님들의 따뜻한 배려이며, 사랑이리라. 매일 찾아오는 이들은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싫은 기색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불교정신의 면모를 보여준다. 오늘 찾아온 보탑사는 경건함과 부드러운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어 편안하고 정겹다. 곳곳이 스민 비구니스님들의 섬세한 손길은 생명을 창조하고 편안한 휴식처를 만든다. 오는 이 막지 않고 가는 이 잡지 않는 불심은 구속되지 않은 자유를 준다. 내가 있으되 내가 없는 불교의 공사상을 닮은 야생화가 무욕의 삶으로 이끌고 있다.

 

 

2015년 무시천동인지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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