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창작수필(신호등)

김장을 담그며

이승애 2015. 1. 7. 22:49

김장을 담그며

 

 

기도하듯 서 있는 나목들 사이를 걷는다. 올 한해가 스크린처럼 펼쳐졌다 사라진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간혹 넘어지기도 하고 덫에 걸려 크나큰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다. 외부적인 요인이 원인이 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의 비합리적인 사고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를테면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 누군가가 내가 필요할 땐 기꺼이 응답해야 한다.’든가, ‘나의 고통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일은 부끄럽고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며칠 전 이러한 잘못된 신념을 알아차리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팔이 불편해 혼자서 김장을 담그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이웃들이 몰려왔다. 아직 김장을 담글 계획조차 세우지 못한 나로서는 몹시 반가운 일이었지만, 마음 한편은 빚을 진 듯 무거웠다. 김장할 날을 정하고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려고 머리를 맞대었다. 나는 불편한 마음에 모든 것을 혼자서 준비하겠다고 우겼고, 그들은 당신들이 준비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고 하였다. 몇 번의 줄 달리기를 하다가 결국 혼이 나고서야 그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기로 하였다.

정해진 김장 날이 오자 이웃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일사천리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서성이며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질색하며 말렸다. 혹여라도 무거운 것을 들라치면 얼른 달려와 번쩍 들어다 주었고, 내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먼저 알아차리고 도와주었다. 모두 합심한 덕택에 배추와 무는 맛깔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어 김치통으로 차곡차곡 들어갔다.

온종일 일과 씨름한 그들이었지만,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는 고마움과 더불어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잘못된 신념, 남이 주려고 하면 거북스러워하고, 어떻게 하면 갚을까 고민부터 하는 괴이한 습성에 대해 반성하는 계기를 주었다. 남의 정성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이요, 겸손임을 깨달았다. 내가 주체가 되어 남을 위하고 배려하는 것은 어쩌면 오만일 수 있다. 기준이 나에게로 향해 있을 땐 상대의 내면을 올바르게 알아차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말을 하고, 싫으면 싫다고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한다. 무조건 순응하는 것만이 참 미덕이 아닐 것이다. 희생과 절제가 필요하지만,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웃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태도야말로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넙죽넙죽 받기만 한다면 분수를 망각한 일이다. 잘 주고 잘 받는 행위야말로 인간다운 모습이리라.

반푼 팔이 이번엔 훌륭한 몫을 하였다. 이웃의 정을 실어왔고 부족한 내 생각들을 패대기쳤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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