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창작수필(신호등)

닭국수와 된장찌개

이승애 2015. 1. 7. 22:47

닭국수와 된장찌개

 

 

날씨가 끄무레하니 몸도 마음도 가라앉아 저녁 지을 일이 아득하다. 이런 날은 누군가 밥을 지어주거나 외식이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허망한 기대이다. 성의없이 냉장고를 연다. 이미 귀찮아진 마음에 마땅한 메뉴가 떠오를 리 만무하다. 냉장고 문을 닫고 쭈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아래층에서 멸치다시마육수 끓이는 냄새가 난다.‘, 칼국수.’둔해졌던 감성이 빠르게 깨어난다.

닭을 꺼내 앉히고 밀가루 반죽을 한다. 채소도 깨끗이 씻어 채 썰어 놓으니 흡족하다. 이제 닭이 익으면 구수한 육수에 얼큰하게 간을 맞추고 국수를 넣어 끓이면 오늘 저녁은 성공이다. 뿌듯한 마음에 절로 노래가 나온다. 그때 K 님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식탁에 준비된 재료를 보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의 생각을 읽어버린 뇌는 혼란에 빠진다. 이대로 상을 차려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메뉴로 준비해야 할지 갈등이 인다. 이왕이면 상대의 미각에 맞추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준비했던 재료를 치운다. 정해진 식사 시간이 임박했으니 서둘러 된장찌개를 끓이고 손쉬운 반찬 몇 가지로 상을 차렸다.

마뜩찮은 상차림을 하고 물러나 있으려니 식사하던 분들이 여느 날과 달리 된장찌개 맛이 좋다고 칭찬이다. 아마도 갑작스럽게 메뉴를 변경한 나의 노고에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나는 민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어 괜스레 수돗물을 세게 틀어 이곳저곳을 닦는다. 기쁘게 음식을 마련하지 못한 마음이 미안하고 화끈거려 내일 아침에 먹을 음식만은 정성을 다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내친김에 견과류를 듬뿍 넣어 멸치볶음 한 찬합에 감자 어묵 볶음 한 찬합, 새우애호박볶음 한 찬합을 만들었다.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 놓고 보니 관계의 긴장에서 오는 팍팍함도 좀 누그러진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간혹 복잡한 신경계가 날이 서거나 한없이 무뎌져 상대의 심사를 알 수 없을 때는 갑갑증이 나 병이 날 지경이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마침 K 님이 주방에 나타나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이미 준비한 재료들을 치워야 하는 서운함이 있었지만, 한 사람의 기분을 잡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어느 땐 현재의 관계 고리가 숨 막히도록 싫을 때가 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니 묵묵히 지켜나갈 뿐이다. 그렇다고 늘 안테나를 세우고 요리조리 살펴야 하는 형편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간혹 억울한 심정이 되기도 하고 억압당하는 느낌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관계의 고리를 끊고 산속에 들어가 산다거나 무인도에 들어가 사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사람다워지고 가치가 매겨지니 말이다. 그래서 수많은 불협화음을 겪으면서도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본인이 싫든 좋든 지구에 사는 존재라면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 좋은 관계라면 서로 지지하고 지탱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사람은 본디 참을성이 부족한 존재이다. 조금만 불편해지면 여타를 따지지 않고 그 관계의 끈을 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득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줄을 놓으려고 애를 쓴다. 오늘 내가 관계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내 생각대로 했다면 조금은 껄끄러운 관계가 되지 않았겠는가. K 님의 식성을 잊지 않고 기억해 낸 덕에 무난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대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내 생각과 뜻을 굽힐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 생각과 행위를 반복하곤 하는 것은 무엇이라 말인가.

새로 부임한 K 님을 더 잘 알려면 앞으로도 몇 달은 더 밀고 당기야 하리라. 어느 땐 아파하기도 하고, 어느 땐 다정하게 의견도 나누며 서로에게 길들어져 갈 것이다. 아름다운 동행을 꿈꾸며 오늘도 내 욕심을 털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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