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창작수필(신호등)

가을은 나를 바라보게 해

이승애 2015. 1. 7. 22:33

 

가을은 나를 바라보게 해

 

 

뜨겁던 여름이 고개를 숙이고 조금씩 물러서더니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다. 황금 물결을 이루던 들녘도 가을걷이로 하나 둘 비어간다. 산국(山菊)들의 얼굴에선 맑은 향기가 자욱하고 무성하던 잡초들도 한풀 꺾여 누런빛을 띤다.

여름 내내 풀과 씨름하던 연장들도 창고로 들어가고 나도 한결 여유가 생겨 알록달록 물든 숲을 찾아가 토실토실 살찐 밤과 도토리를 줍는다. 곳곳에선 감들이 붉게 익어가고 각종 과일과 곡식들은 식탁을 풍요롭게 한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도 넉넉해져 이웃과 즐거운 나눔을 가진다. 하루가 다르게 분칠하던 나무들이 서서히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면 숲은 야위어가고 고요한 평온 속으로 빠져든다.

텃밭엔 밤새 내린 서리에 검은색으로 변한 고춧대가 숨이 넘어가고 있다. 그 주검을 슬프게 하는 어린 꽃들의 초췌함은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이별의 몸살을 앓으면서도 끝끝내 책임을 다한 고추의 숭고함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다.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돌아보지 못한 마음은 뒤죽박죽 섞여 무엇 하나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다. 남들 앞에선 그럴싸해 보였을지 모르는 껍질들. 하나씩 벗길 때마다 부끄러움으로 화끈거린다. 부족한 것이 많은 만큼 과대포장도 많았다. 욕심을 부려 이것저것 손을 댄 일들은 마무리되지 않은 채 남아 어수선하다. 무엇이 되려고만 했지 나를 다듬고 깎아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지는 못하였다. 지식을 얻고자 내달리던 시간은 풍성한 소출을 내기보다 허망함을 준다. 사람이 올바르게 살기 위해선 지식이 큰 몫을 하지만, 잃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움켜쥐려고 하면 할수록 멀어져가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 내 틀에 갇혀 허우적대느라 어머니의 허리가 굽어가는 것도, 산속에서 홀로 외로움을 삭이고 애태우며 슬픔을 삭이는지도 잊고 살았다. 오늘 아침 우연히 종횡무진 거침없던 어머니의 발걸음이 더디고 무거워져 힘겨워하시는 것을 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팔십 넘은 노구를 끌고 딸 뒷바라지 하시느라소리조차 내지 않으셨던 어머니께 불효했다는 죄책감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무엇이 되고자 이렇듯 허둥대며 살고 있는가. 잡초들도 땅속에 자신을 묻고 오랜 인내와 기다림으로 생명을 태동시키고 꽃을 피우고 결실을 볼진대 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쓰름하다. 그동안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달리기만 하였다.‘라는 독선에 갇혀 를 바라보지 않았다. 무엇을 얻기 위해 그리하였는가.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지식에 목매었을 뿐이다.

산 중턱에 오르자 삽주나물이 봉긋한 씨앗을 품고 비스듬히 서 있다. 그중 두어 뿌리 캐보니 꽤 실한 것이 약효가 최고일 것 같다. 이 식물의 약성은 사람의 소화불량, 복통, 설사 등 여러 질병을 다스리는 묘한 신통력을 가졌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일상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귀한 역할을 하는 약초가 될 수 있었으리라. 창공을 가르던 고추잠자리도, 온갖 벌레들도 땅속으로 들어가 우화(羽化)의 꿈을 꾼다. 자연은 봄이 되면 여린 새싹을 틔우고, 여름엔 무수한 잎을 드리워 넉넉한 생명력으로 풍요를 노래하다가도 가을이 오면 순리에 따라 생의 옷을 벗고 홀연히 떠날 줄 아는 지혜를 지녔다.

자연은 결코 내 주장과 내 요구로 대립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제 역할을 다함으로써 조화로운 질서를 유지한다. 나는 결코 조화로운 삶을 살지도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를 바라보는 데 인색했을 뿐 아니라 남에게 기대어 횡재의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일을 피해 가기 위해 요령을 꾀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핑계대고 합리화시키며 얕은 수작을 부렸다. 무지해서 저지르는 실수나 잘못은 용서되지만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것은 죄악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나는 알고 있는 것을 일부러 외면하고 피해버렸다. 남들 앞에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채우기 위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행하지 않았다는 죄의식에 마음이 질금거린다.

깊어가는 가을의 길목에서 생성과 소멸의 조화를 배운다. 살아온 삶의 궤적을 뒤돌아보고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은만을 완성하는 일이 아님을 배운다. 움켜잡은 손을 펴고 욕심껏 들여놓은 많은 것들과 결별하기 위해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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