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창작수필(신호등)

분갈이를 하면서

이승애 2015. 1. 7. 22:32

분갈이를 하면서

 

 

겨우내 방안에서 웅크리고 지낸 화분들을 베란다에 옮겨 분갈이하였다. 그동안 관심을 주지 못한 탓인지 화초들은 하나같이 뿌리가 뒤엉켜 있었다. 제대로 발을 뻗지 못해 상해버린 뿌리와 말라버린 줄기를 잘라내고 큰 화분에 배양토를 넉넉히 넣어 새집을 마련해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늘어졌던 아이비와 호야가 먼저 생기를 차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제라늄과 바이올렛도 제법 잎사귀가 반듯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다육식물은 영 시원찮은 얼굴로 애를 태운다. 햇볕을 따라 요리조리 옮기며 정성을 기울여도 잎은 무르고 줄기는 힘없이 옆으로 기울어진다.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화분에서 꺼내니 뿌리가 심하게 썩어 있었다. 마사토가 부족해 일반 흙을 채웠더니 배수가 잘되지 않아 상해버린 것이다. 항상 씩씩하게 자라는 녀석들이라 환경이 변해도 잘 적응하리라고 믿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부랴부랴 마사토를 사다가 큰 화분에 옮겨 심고 살아나길 기원해 본다.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녀석의 귀한 생명을 잃게 할 뻔했다는 사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얼마 전에 오빠의 중요한 서류함이 고장난 적이 있었다. 오빠는 고장의 원인을 알기 위해 서류함을 열어 놓은 채 외출하였고, 나는 전문가 흉내를 내며 요리저리 살피다가는 부속 두어 개를 해체하기까지 이르렀다. 기계의 구조와 작동에 문외한이 아무리 주물럭거리며 들여다봐도 고장의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다. 한 삼십여 분 낑낑대다가는 제풀에 꺾여 서류함을 꽝 닫아버렸다. 그 순간 방바닥에 구르고 있는 부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아이구.’ 당황한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내가 고쳤노라 으스대며 어깨에 힘 좀 주려고 했던 마음뽀가 금세 풀이 죽고 말았다. 때 늦은 후회로 열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부속 하나 잃은 서류함은 입을 굳게 다물고 접근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거금을 들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살면서 쉽게 저지르는 일들이다. 상대방의 의도와 방식을 생각지 않고 내 기준에 따라 일을 처리해 관계가 어렵게 되곤 한다. 다행히 어떤 일들은 잘 해결이 되는 때도 있고, 상대의 아량에 따라 수월하게 넘어가기도 하지만, 큰일이거나 중요한 일은 나뿐 아니라 상대를 곤란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상대가 화를 내면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왜 야단이냐?’며 오히려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내 틀을 고수하는 한 그 어느 것도 바르게 볼 수가 없다. 아무리 훌륭한 희생과 봉사라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것이라면 행하지 아니한 것만 못하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내 눈높이에 맞춘 잣대가 수도 없이 불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의 내연성보다는 외연성에 더 초점을 맞추는 고약한 습관 때문이리라. 상대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선 그 속으로 들어가 살펴야 할 것이다.

조화로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세상을 깊은 눈으로 응시할 줄 알아야 하리라. 그럴 때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정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삶의 중심축을 나에게 둔다면 세상과 나 사이에 틈새가 생겨 불균형을 이루고 결국엔 파국으로 치닫지 않겠는가.

창가에 앉은 화분들이 제각기 생명을 연출하고 있다. 비록 햇살 가득한 자연 품속은 아니지만 내 작은 정원에서 각기 이름을 갖고 살아가리라. 윤기 잃었던 다육식물도 이제 제 몸에 맞는 토양을 만났으니 마음껏 뿌리를 내려 다른 식물들과 화음을 이루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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