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길
이 승 애
산에서 내려오다 길을 잃었다. 탐스러운 취나물에 마음을 뺏겨 조금씩 따라가다 낯선 산등성이 쪽으로 가고 말았다. 아차 싶어 아무리 둘러봐도 일행은 간 곳이 없다. 다급해진 마음에 함께 간 사람들을 불러보았으나 빈 메아리만 돌아왔다. 산에 홀로 남았다는 불안감에 허둥지둥 일행을 찾아 내려가려는데 여기저기 숨어있는 복병들이 좀처럼 길을 내주지 않는다. 가까스로 길을 짚어 내려오면서 내 삶의 가시덤불을 생각해본다.
수녀원으로 향하였던 길은 영원히 잊지 못할 길이다. 부모님과 직장 동료, 그리고 몇몇 수녀님은 내게 수도자의 길을 가도록 권하였다. 처음엔 본인이 바라는 길이 아니라며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었지만, 자주 듣다 보니 어느 날부터 그 분들의 말씀이 기도처럼 들렸다. 그 이후 내가 살아온 길은 울퉁불퉁 사연도 많다.
눈이 하얗게 내리던 정월 어느 날, 스물아홉 해 동안 머물렀던 보금자리를 떠나 수녀원으로 향하였다. 부름을 받고 달려간 길은 마치 에버랜드 장미화원처럼 아늑하고 따뜻했다. 내가 밟는 곳마다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약속의 땅을 향한 정진, 낯설고 힘들었지만 기쁨으로 충만했다.
가시덤불을 지나니 푸른빛 생명으로 활기가 넘쳤다. 여기저기서 환영하듯 지저귀는 산새들, 발밑을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다. 생의 찌든 때가 벗겨지듯 가볍다. 평지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하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오듯한다.
기쁨의 날도 잠시 몇 개월이 지나자 행복했던 날들이 조금씩 그늘지기 시작하였다. 건강 신호에 빨간불이 켜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나빠져 심각하게 체중까지 감소하였다. 평소에도 그다지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으나 한꺼번에 발병하는 병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치료를 위해 먹기 시작한 약은 역으로 부작용을 일으켰다. 이중삼중으로 고통이 겹치자 내 모습까지 괴기怪奇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친구를 찾았다. 힘겨워하는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는 친구의 손이 따뜻했다. 두어 시간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른 정상은 황홀하였다. 정상에서 목표에 다다른 성취의 쾌감은 가파른 내리막길도 즐겁게 한다. 산 중턱쯤 내려왔을까. 산을 오를 땐 보이지 않던 취나물이 또다시 내 욕심의 수렁을 파고들어 놓아주지 않는다. 통제력을 잃은 마음을 따라 요리조리 헤집고 다니다 보니 길을 잃고 말았다. 일행은 벌써 내려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동안 꼬불꼬불 이어지던 길도 꼬리를 감추고 생경한 풍경이 펼쳐졌다. 갑자기 낭패감과 두려움에 머리칼이 곤두서고 다리는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겹겹이 싸인 산속 정적은 무섭도록 강하게 조여온다. 두려움과 초조함에 목구멍은 타들어 가고 등줄기는 진땀으로 흥건히 젖는다.
여기저기 산재한 복병을 피해 가까스로 안전지대에 도착했나 싶었는데 그것도 잠시, 멧돼지가 지나갔는지 좁은 산길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참나무 밑동들이 처참하게 파헤쳐져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로 보아 얼마 되지 않은 듯하였다. 어쩌면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진저리가 쳐졌다. 온 신경에 촉수를 곤두세우고 죽을힘을 다해 내달았다.
몸에 이상이 생기자 하느님께 향한 마음이 자꾸만 흩어졌다. 머릿속은 붕 떠 있는 것 같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으니 아침이 되면 두려움이 앞섰다. 자신이 온전치 않으니 괜한 열등감만 커졌다. 마치 낙오자가 된 듯 수치감과 불안감에 빠지기도 하고, 자기 연민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쉽게 포기할 수 없어 안간힘을 쓰며 버티다 결국 길을 잃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수녀원으로 향한 지 삼 년 반 만이다.
수녀원에서 돌아오자 사람들은 죄인을 대하듯 냉랭해졌다. 무슨 문제를 일으키고 나온 것은 아닌지, 성격 장애로 적응을 못하고 나온 것은 아닌지 심문하듯 묻곤 하였다. 지칠 대로 지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의 슬픔은 더욱 깊어져 갔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셨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리듯 억지로 들어선 길은 낯설고 힘들어 수없이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홀로 개척해야 하는 길, 사회적 지위나 명예는 꿈도 꿀 수 없는 낮은 자리에서 허우적거릴 때마다 비애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마냥 신세타령만 할 수만은 없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시간이 허락될 때면 한복 그림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요리도 배웠다. 그러자 점차 남의 시선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산에서 내려오니 일행은 내가 이색 지대에서 곤두박질치며 생과 사의 길을 오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희희낙락이다. 내 몸은 온통 땀과 긁힌 상처로 쓰라린데 저들은 저렇게 태평할 수 있다니. 그러나 오늘도 저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어 행복하다.
어느새 새로운 길을 걸어온 지도 이십여 년이 된다. 여전히 울퉁불퉁한 길을 걷고 있지만, 좌절하거나 희망을 잃지 않는다. 지금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기쁨이요 기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길은 포기와 좌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성된다.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도 멈추어 설 수 없는 순례의 길. 어느 땐 신작로처럼 환한 길이 펼쳐지다가도 금세 꼬불꼬불 힘겹고 고통스러운 길로 바뀌곤 한다. 그러나 인간의 길은 소통의 길이요, 희망의 길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그 길 선상에서 아웅다웅 다투며 함께 걷고 있다. 어느 땐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기도 하고, 활기차게 활보하기도 한다. 나는 간혹 실타래처럼 엉킨 길에서 방향을 잃곤 하지만, 나와 함께 걸어가는 이들이 있어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2013. 6. 2.
한국수필 2015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