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을 고르며
미국에서 지인이 오시는 날이다. 멀리서 오는 손님에게 무엇을 대접할까 고민하다 샤브샤브와 월남쌈을 대접하기로 하였다. 서둘러 시장을 보고 청소를 한 후 음식에 맞는 그릇을 고르기 위해 수납장에 넣어 두었던 그릇들을 꺼냈다. 그래도 좀 귀티가 난다 싶어 아껴 두었던 그릇들인데 막상 꺼내놓고 보니 예상과는 달리 제각각 형태도 다르고 짝도 맞지 않아 품위를 지키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시간이 촉박하여 어디 가서 빌려 올 수도 없고, 사올 수도 없는 형편이라 구석구석 뒤지며 다른 그릇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십 여분 씨름한 끝에 원하던 그릇을 찾아내었지만, 한쪽 귀퉁이가 깨져 품위 있는 상차림을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깨진 접시가 아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내 마음의 그릇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십 여년 황급히 달려온 인생 마차엔 금이 가고 깨진 그릇이 말없이 수납장을 지키듯 내 안에도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깨진 삶의 그릇이 나뒹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손상이 컸던 사건은 내 나이 열여덟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와 오십도 채우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른 언니의 죽음이다. 그 때문에 내 인생 그릇은 볼품없이 금이 가고 깨져 무엇 하나 제대로 담아낼 수가 없었다. 조각난 그릇을 새것으로 바꾸듯 깨져버린 삶의 그릇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숱한 시간을 아파하다 조용히 한편에 밀어놓기로 하였다. 그럭저럭 살다 보니 세월에 따라 그릇의 형태도 달라지고 새로운 그릇들이 만들어졌다.
스물아홉에 세속을 떠나 수녀원에 들어갔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드릴 그릇 하나를 빚기 시작하였다. 무엇을 담아도 어울릴 그릇을 빚으리라 다짐하며 열심히 정진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의도와는 달리 일그러지고 깨지고 금이 갔다. 점점 약해져 가는 의지를 가까스로 잡고 금이 가고 깨진 마음의 그릇을 바로 잡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헛수고에 그치고 말았다. 이미 균형을 잃어버린 일상의 물레질은 헛돌기만 하였다. 그럴수록 나의 조급증은 더욱 커졌고 그 조급함은 심신을 허약하게 하였다. 결국 미완성의 그릇은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수녀원을 나오고 말았다.
빚다 만 그릇이 깨져 그 조각들이 나를 찔러댔다. 찔러대는 조각을 하나하나 모아 새로운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새것으로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발상의 시도였다. 지금은 그렇게 빚은 그릇이 삶의 디딤돌 역할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온전한 그릇으로 산다고는 할 수 없다. 하루에도 여러 번 그릇의 형태를 바꾸는 유약한 존재다. 굴곡진 삶을 사는 존재니 금이 가고 깨지고 모난 모서리에 때가 껴 볼썽사나운 모습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땐 마음 한구석에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작은 종지 다발이 산만하게 놓여있기도 한다. 이기심으로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괜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역정을 내느라 사랑 한 사발 담아내지 못한 흔적이다. 못된 성미로 울근불근하다 찌그러뜨린 양푼도 있고 허영과 욕심으로 채워진 얇은 그릇이 깨어질 듯 위태롭기도 하다. 형편없는 자신의 그릇에 절망하여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조용히 자신을 뒤돌아보곤 한다.
얌전한 규수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는 자태 고운 그릇이 보인다. 아, 나에게도 있었다. 금이 가고 깨진 그릇만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성자처럼 남의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였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 줄도 알았다. 그 옆 맑고 투명한 유리그릇처럼 울퉁불퉁한 성깔을 연마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비록 위선과 거짓으로 만들어진 불투명한 그릇이 볼품없이 찌그러져 나뒹군다 해도 내게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그릇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게 한다.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깨진 그릇이나마 호일로 감싸고 무를 얇게 썰어 장미 모양으로 꾸며 갖가지 채소를 담아내니 그럴듯하다. 멸치와 표고, 다시마를 넣어 육수를 만들고 청양고추와 풋고추를 다져 액젓과 곁들여 놓고 고기도 정갈하게 담는다. 드디어 기다리던 손님이 오셨다. 한국에서 먹는 샤브샤브와 월남쌈이 맛있다고 잘도 잡수신다.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작은 소망하나 얹어본다. 각박한 세상을 사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맑고 깨끗한 물 한 사발 대접할 수 있는 자비의 여인이 되고 싶다. 삶에 허기진 이가 있다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영양밥 한 그릇 담아주는 밥그릇이 되어도 좋겠다. 이왕이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된장국도 담았다가 시원한 뭇국도 담았다가 달콤새콤한 비빔밥 한 그릇 담아내는 다용도 대형 그릇이면 좋겠다. 더 나아가 나와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 마음껏 필요한 것을 담을 수 있는 빈 그릇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시기와 질투, 배신과 기만에도 깨어지지 않는 투박하고 견고한 질그릇이 될 수 있다면 더욱더 좋으련만. 아직 손보지 못하고 넣어둔 마음의 그릇을 꺼내 깨어진 부분을 고치고 보수하여 정갈한 그릇으로 만들어야겠다. 거기에 따뜻한 사랑을 담고, 친절과 온유를 담아 이웃에게 나눠주리라.
사람은 모두 다른 그릇을 갖고 살아간다. 그릇에 담기는 삶의 양상도 제각각 다르기 마련이다. 서로 다른 그릇의 본질을 이해하고 서로 소중하게 다룬다면 각자의 마음엔 아름다운 마음씨와 사랑이 담겨 고운 빛을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그릇을 먼저 탓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로가 부딪쳐 금이 가고 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각양각색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난 우리, 그 고유성으로 제각각의 역할을 하며 오색찬란한 생명을 담아내고 있다. 각기 다른 그릇이 모여 하나의 밥상을 이룰 때 세상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이 되고 벗이 되고 이웃이 된다.
한국수필 제236호(2014년 10월호)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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