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창작수필

지금은 통과의례 중

이승애 2021. 10. 8. 22:45

지금은 통과의례 중

 

이승애

 

진천 배티성지 순교자 묘지를 갔다 내려오는 길이다. 그늘진 산자락에 보랏빛 도라지꽃이 수줍게 서 있다. 반가운 마음에 휴대전화기를 꺼내 사진 한 장 찍는데 산등성이를 넘어 온 바람 한 줄기가 도라지꽃을 훅 치고 간다. 맥없이 엎어지더니 의연하게 일어선다.

외딴 산중에 홀로 피어 저만치 성장하기까지는 녹록지 않았으리라. 껍질을 벗기고 나오는 진통과 순순히 거름이 되어 준 껍질의 희생 덕분에 하나의 생명으로 우뚝 서게 되었고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었다.

고구려의 하늘을 연 개국의 영웅 주몽은 인간이 아닌 알로 탄생하였다. 그러나 알의 존재와 의미를 깨닫지 못한 금와왕은 불길한 징조로 여겨 개와 돼지에게 던져 먹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짐승도 먹으려 하지 않자 그는 다시 소와 말이 다니는 길바닥에 던져 깨지기를 바랐지만, 오히려 소와 말은 알을 피해 다녔다. 이런 이상 징조에도 불구하고 왕은 더 확고하게 알을 없애려 하였다. 들판에 버려진 알이 그의 계획대로 되지 않자 그때서야 왕의 완고했던 마음은 해체되고 어머니 품으로 되돌려주게 된다. 알은 비로소 온전한 인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주몽이 금와왕에게 여러 차례 수모와 시련을 겪으며 자신의 존재를 더 확실하게 다져갔듯 살아 숨 쉬는 생명은 덜 갖춰진 상태로 태어나 완성을 향해 간다. 그 길은 순조롭지만은 않다. 어느 땐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고, 고비 사막에 던져지기도 한다. 그 거칠고 힘든 여정을 통해 생명 하나하나는 존귀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반복한다.

주몽이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재탄생되었어도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우리 각자도 어떤 통과의례를 통해 그 보상을 얻게 된다. 어느 땐 가볍게 통과하기도 하지만, 또 어느 땐 좁고 험악한 협곡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해야 하는 때도 있다.

나는 다섯 살 때 위험천만한 이 협곡을 지나쳐 왔다. 옆집에 살던 친구 숙이가 살구에 양잿물을 묻혀 먹이는 바람에 사달이 난 것이다. 채 여물지도 않았던 위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먹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지만, 절제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에게 주어진 보상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짊어져야 할 멍에의 시간은 길다. 그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세상을 뜨시자 우리 가족은 풍랑에 흔들리는 배 꼴이 되어 갔다. 오십을 갓 넘은 어머니와 이제 막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난 언니, 대학생이던 큰오빠, 대학 입시를 앞둔 작은오빠,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언니는 스스로 디딤돌을 자처했다. 그 희생은 또 다른 시련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 시련을 딛고 일어섰고,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마음에 근육이 붙자 신은 또다시 시험대에 올렸다. 몇 년을 벼르다 들어간 수녀원은 열정만으로는 부족했다. 입회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급기야 몇 개의 질병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내 삶을 흔들어댔다. 몸이 성하지 않으니 마음도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았다. 봉헌의 삶은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기어이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그렇다고 완전 패배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짧은 시련은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통과의례였다.

젊은 시절 나는 통과의례를 반드시 거쳐야만 참 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미욱하게 그저 견디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다른 무엇이 나를 채워줄 줄 알았다. 그래서 이론과 실제의 괴리 속에서 헤매기 다반사였고, 결과는 뻔했고 나는 제풀에 꺾여 나뒹굴곤 하였다. 그런데도 운명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돌고 돌아 뫼비우스의 띠처럼 매듭진 그 자리로 되돌아오곤 했다.

삼십여 년 동안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작은오빠가 폐암 선고를 받았다. 아흔이 넘은 어머니와 이제 막 육십을 넘은 오빠의 병은 종잡을 수 없는 돌개바람을 일으키곤 하더니 오빠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닳고 닳은 육체에 유폐된 어머니는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 채 오늘도 형벌 속에 누워 계신다.

거듭되는 시련의 의미를 깨닫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이 시련을 통해 또 다른 눈을 뜨게 된다는 것과 새로운 삶의 기술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내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는 얼마나 남았는지, 또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는 모른다. 두려우면서도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기대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모든 신성성을 갖추고 태어났지만, 무사안일하게 살다간 김알지의 삶을 살 것인지, 시련을 뛰어넘어 고조선의 하늘을 되찾고 고구려의 하늘을 연 개국의 영웅 주몽의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잃은 것이 많았지만, 그 잃음을 통해 언제나 새로운 것을 얻었다.

몇 년 전 문학이라는 특별한 문을 열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산통을 겪으며 참 나를 찾아가는 중이다. 어느 땐 영롱한 이슬을 만나기도 하고, 어느 땐 성난 파도를, 또 어느 땐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시간이 모여 나를 완성의 길로 이끌어 갈 것이다.

어머니가 마지막 의례를 준비하고 계신다. 그 많은 통과의례를 다 거치고 생의 끝자락에서 초연하시다.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나는 것이 두렵지만,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여 세상 하직할 때는 뒤 돌아보지 않고 훨훨 하늘까지 가셨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오실 때 갈 것을 염두에 두셨지만, 최선을 다하셨다. 마지막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나면 어머니 생애는 완성이다. 나는 두서없이 흘러왔어도 앞으로는 어찌 살아야 할지 어머니를 보며 방향을 잡는다.

뒤돌아서 오려는데 미래를 향해 발돋움하는 보랏빛 꽃이 은은하게 산자락을 적신다.

 

 

 

이승애 약력

 

'2021년 창작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숲에서  (0) 2021.12.30
잡동사니  (0) 2021.06.27
삶과 도시를 리디자인 하다  (0) 2021.06.27
옛집과 어머니  (0) 2021.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