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창작수필(신호등)

가을 앞에서

이승애 2015. 1. 7. 22:36

가을 앞에서

 

 

황금 들녘을 스쳐온 온 맑고 향기로운 바람에는 풍요가 담겨있습니다. 여름내 무더위와 비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자연은 한껏 달아올라 절정에 오르고 있습니다.

올여름은 유난히 무덥고 비가 잦아 그 어느 것도 수월치가 않았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이라도 읽을라치면 끈끈하게 달라붙는 더위 때문에 기어이 책 읽기를 포기해야 했지요. 그뿐인가요. 쏟아지는 땀 때문에 미뤄놓은 일은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은 도톰한 이불을 꺼내고 옷들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더워서 견딜 수 없다고 투덜대던 입에선 흥겨운 노랫가락이 흘러나옵니다. 내친김에 시장에 들러 잘 익은 사과랑 배 한 바구니씩 사 들고 왔습니다. 입안을 감도는 달콤새콤한 맛이 얼마나 좋은지요.

이 귀한 생명은 농부의 정성을 받아 제 몫을 다하였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하였을까? 이 작은 생명도 이렇게 커다란 몫을 다하였는데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뒤틀려버린 일들이 삐죽삐죽 고개를 내밉니다. 요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합리화시켜보지만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하기가 귀찮아서 미루어놓은 일들이 허다합니다.

남들 앞에선 바쁘다고 수선을 떨었지만, 사실 잃어버린 자투리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요. 지나가는 볕을 흘러 보내지 않고 맛좋은 속살로 제 몸을 가득 채운 과일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시간의 속성에 따라 무심코 흘려버렸던 순간은 빈 쭉정이로 남아 있습니다. 그 쭉정이를 베어내고 싶어 청정한 가을 하늘을 바라봅니다.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산등성이를 다녀온 바람이 마른기침을 하며 숲으로 이끌어갑니다. 그곳엔 여름내 웅성대며 푸른 얼굴을 맞대고 비벼대던 나뭇잎들이 조용히 자신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겸손하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숲의 모습을 보니 내 안에 덕지덕지 쌓인 욕심을 내려놓고 싶어집니다. 끊임없이 움켜쥐고 놓을 줄 모르는 습성 때문에 가득 차 버린 마음은 여유가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채 산마루에 오르자 토실토실 살이 오른 밤이 내 발목을 잡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마음은 사뭇 설렙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산마루를 지키며 결실을 본 아름다운 밤나무를 끌어안고 고마움을 전합니다. 툭하면 힘들다고 투덜대고 작은 희생에도 우쭐대며 공치사하던 나 자신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마음이 텁텁해집니다. 타박타박 따라오던 마분지 같은 햇살이 내 등을 토닥이며 사랑의 문장을 새겨 줍니다.‘괜찮아. 괜찮아.’

깊어가는 가을, 잔주름 많고 수심 그렁그렁 고인 마음 후두두 털며 생의 밧줄 새로 잡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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