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발표작

이승애 2017. 2. 14. 23:40

 

이승애

 

오른손바닥에 콩알만한 혹이 생겼다. 잠시도 쉬지 않던 손이 더는 버틸 수가 없었는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하였다. 의사는 손을 너무 혹사해 인대 손상이 심하다고 하였다. 수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수술실에서 나온 내 손은 하얀 붕대로 동여맨 채 신음하고 있었다. 무심했던 마음이 미안해졌다.

오른손이 일을 놓았으니 왼손이 허겁지겁하다. 몸시중에, 일상의 잡다한 일까지 혼자 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건만 버거운 세월을 함께 견뎌온 제 짝이 안쓰러운지 투정 한번 부리지 않는다. 문제는 입안의 혀처럼 굴던 오른손과는 달리 서툴고 굼뜨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다.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글쓰기나 바느질, 칼질은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밥을 먹으려면 젓가락이 제멋대로 놀아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이 미숙하고 굼뜬 왼손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에 내게 손이 하나만 있었다면 어찌 이 많은 일을 거침없이 해내고 내 삶을 감당해 왔을까. 고마운 마음에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두 손을 끌어안아 본다. 교감하는 두 손이 따뜻하다. 가슴이 먹먹해 온다.

불현듯 부모님의 따스한 손길이 생각난다. 두 분의 손은 삶의 부스럼처럼 갈라지고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있었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따뜻한 사랑과 생명에 닿아있었다. 아버지의 손길이 닿으면 병든 사람이 나았고 희망을 잃었던 사람이 일어섰다. 척추를 다쳐 앉은뱅이가 된 아이를 고쳐주었고, 아이를 낳지 못해 소박데기로 불리던 서러운 여인을 치료하여 잉태할 수 있는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어머니는 가난한 이웃의 다정한 벗이었다. 황무지에 꽃씨를 뿌려 온 동네를 꽃밭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고, 정성껏 털실로 짠 스웨터로 가난한 이웃의 시린 등을 따습게 하였다. 운 좋은 나는 두 분의 긍정적이고 바지런한 손을 물려받았다.

두 분의 유전자 덕분일까? 내 삶에 8할도 손으로 이루어질 만큼 그 몫이 크다. 그런 손에게 못생겼다고 남에게 내놓기 싫어하고 타박만 하였다. 손을 펴고 가만히 바라본다. 오십여 년 살아온 삶의 흔적이 보인다. 손바닥에 그어진 운명의 지도들과 손가락에 새겨진 지문들은 내 고유성을 담고 빛을 발하고 있다. 비록 굳은살이 박이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굵어져 맵시라곤 찾아볼 수 없을지언정 권력 앞에서 손을 비비는 야비한 손은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어루만져주기도 한다.

내 손은 육체의 거점으로 무수히 많은 일을 해왔다. 그중 가장 빛났던 일은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한 일이다. 그날은 유난히 추운 겨울밤이었다. 친구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바닥에 할아버지 한분이 쓰러져 있었다. 역한 술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를 흔들어 깨웠지만 반응이 없었다. 옷을 벗어 덮어 드리고 차가워진 몸을 덥히기 위해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을 모두 동원했다. 삼십 여분 애를 쓴 끝에 드디어 할아버지가 깨어났다.

또 한 번은 사회복지시설에 근무할 때였다. 장애인 한분이 급히 음식을 먹다 그대로 쓰러져 숨을 쉬지 못하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시퍼렇게 변해갔다. 나는 과감히 그의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음식물을 모두 꺼내 버렸다.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더니 숨을 쉬기 시작하였다. 만약에 손이 소심한 방관자였다면 어찌 그 귀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까. 절제절명의 순간 기지를 발휘한 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섬세함이 요구되는 일에도 재주를 부릴 줄 안다. 한복에 그림을 그려 넣어 한층 멋을 내기도 하고, 한지로 각양각색의 작품을 만들어 낼 줄도 안다.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보살피고, 가꾸는 일도 내 손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만하면 내 손은 마땅히 대우를 받아야 하거늘 혹사만 당한다.

나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아름다운 손을 알고 있다. 폐지를 주워 번 돈을 이웃을 위해 내놓았다는 할머니의 손, 또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오천 불씩 건네주던 미국인의 따뜻한 손을 기억한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밤낮으로 공장에서 일한다고 하였다.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손이던가.

손은 인간의 가장 솔직한 언어요, 마음의 도구이며 직접적이고 행동적인 언어다. 손은 마음의 심부름꾼이다. 손이 향하는 지평에 따라 그의 마음이, 지혜가, 교양이, 인품이 드러난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손이 거짓과 탐욕과 죄를 향한다면 그 손은 이미 생명이 없는 손이다.

손을 들여다본다. 자랑스럽다. 고운 티는 없지만 사랑스럽다. 가만히 쓰다듬다 보니 어느 결에 두 손이 무정한 나를 쓰다듬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거룩한 손처럼 거친 나를 쓰다듬고 있다. 마음이 따듯해진다.

 

좋은수필 201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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