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이승애
산마루에 응어리처럼 엉겨 있던 먹구름이 마침내 참았던 울분을 토해내듯 굵은 빗줄기를 쏟아낸다. 장마의 서막이 열렸다. 불볕더위와 가뭄에 지쳐있던 대지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온몸을 내맡기며 환영한다. 쩍쩍 갈라지던 강바닥도, 저수지도, 쏟아지는 비에 생명력이 넘친다. 몸매를 가다듬은 녹음방초가 더욱 싱그럽다.
가뭄으로 타들어 가던 대지가 비에 함뿍 젖어 들 때면 나도 소소한 일상을 밀어놓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책더미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낸다. 책 읽는 시간은 나에게 푸른 깃발을 꽂는 시간이며, 누추한 내 영혼에 색동옷을 입히는 시간이다. 비가 주는 선물이다.
고대하던 비라도 지나치면 고역스럽다. 며칠 전만 해도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라도 지냈으면 했는데 연일 비가 내리니 간사하게도 비가 지나치게 온다고 불평을 터뜨린다. 몸은 물먹은 빨래처럼 무겁고 입맛도 의욕도 없어진다. 잘 가꾸어 놓은 정원은 극성스럽게 자란 풀에 치여 제구실을 못하고, 잘 자라던 호박과 오이는 지신이 들어 소출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집안은 습기로 꿉꿉하고 싱크대와 욕실엔 검은 곰팡이가 우후죽순으로 뿌리를 내린다.
장마는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사소한 불편함이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지만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사달을 낼 때는 두려움마저 들고 그 사달이 사람의 삶까지 무너뜨리면 그때 장마는 장마가 아니다. 재앙이 된다.
인생의 장마도 마찬가지다. 죽을 만치 힘들어 주저앉으면 더 보태어 희망을 앗아가 버린다. 돌아보면 인생의 장마는 정화의 시기요, 경고의 시기이기도 하다. 극복하는 법을, 내려놓는 법을, 서슴지 않고 잘라내는 법을 배우게 한다. 욕망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다스리고 고속 질주하는 오만의 허를 찔러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함으로써 나를 거듭나게 한다.
중국에 가셨던 오라버니가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품고 왔다. 건강하던 뇌혈관 한 부분이 막혔다고 하였다. 뜻밖의 소식에 눈앞이 캄캄했다. 머리에서 천둥소리가 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평생 성실한 주님의 사제로 살아왔으니 웬만한 천둥 번개쯤은 피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오만에 지나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삼십 년 가까이 주님의 사제로 살면서 어찌 기쁜 일, 즐거운 일만 있었으랴. 뜻하지 않은 역풍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길을 찾기 위해 고뇌의 숲에서 눈물도 흘렸을 것이다. 기실 풀지 못한 응어리들이 머릿속을 떠돌다 하나의 매듭이 되었는지 모른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던가. 내 삶도 불볕더위를 거쳐 질척거리는 장마전선에 머물러 있다. 안면신경 장애에 오른손 통증으로 일하기가 쉽지 않다. 우중에 우환이다. 뜻하지 않은 우환에 얼이 빠졌다. 몽당 몽당 잘려나가는 삶의 조각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가슴만 터질 듯 아파온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금 이 순간도 필요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굵은 빗줄기가 어느새 가늘어지더니 비가 그치고 해가 솟아올랐다. 당연하다 여겼던 햇빛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의 생도 음지에서 양지로 나갈 때면 이렇게 감사하리라. 눅눅해진 집안을 뽀송뽀송하게 말리기 위해 보일러를 틀었다. 구석구석 파고든 곰팡이도 깨끗이 없앨 수 있는 기회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솔과 걸레를 집어 들었다. 곰팡이를 제거할 묘약도 챙겼다.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우울을 닦는다. 흥건하게 고여 있던 슬픔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의기소침했던 마음이 환해지고 기운이 난다. 내친김에 『비엔나 숲속의 이야기』(요한 슈트라우스 2세 왈츠)를 틀었다. 아름다운 음률이 집안 곳곳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넉넉해진 마음으로 차 한 잔까지 곁들였다. 장맛비가 잠시 멈추어 준 시간은 이렇게 덤이다.
내일도 비가 온다는 예보다. 너무 지나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마가 지나면 대지는 격한 호흡을 가라앉히고 숨 고르기로 평화를 불러들일 것이다.
내 생에 닥친 이 어이없는 장마도 어느 순간 끝이 나면 찬란히 해가 떠오를 것이다. 다시 비가 온다 해도 나는 그 비가 지나가는 것인 줄 알기에 염려하지 않으련다. 우중에서도 사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