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네 탓
모두가 네 탓
이 승 애
퇴근 후 집안을 들어서는데 방안이 캄캄하였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어머니!” 하고 부르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영 시원치 않고 시큰둥하다.
“왜 불은 안 켜시고, 텔레비전은 왜 안 보셔요?”
“네가 텔레비전을 잘못 사와서 볼 수가 없다. 보다가는 꺼지고.”
어머니의 한숨 섞인 말씀은 공격적이고 원망이 담겨져 있다. 나는 얼른 불을 켜고 애교를 부리며 텔레비전을 켰다.
새 텔레비전이 우리 집에 들어 온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이사한 후 바깥출입이 어려운 어머니를 위해 화면이 크고 눈에 자극을 덜 준다는 LED 텔레비전을 구입하여 설치하였다. 하지만 아파트의 수신이 미약한지 수시로 꺼지거나 켜지지 않아 심기가 불편한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잘못 사왔기 때문이라고 원망을 하시곤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이 잘못되거나 실수를 하게 되면 네 탓으로 돌리곤 한다.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네 탓을 하는 것이다. 가족이 모여 즐겁게 지내다가도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원인을 상대에게 돌려 다툼이 일어나곤 한다.
얼마 전 친구들이 모여 저녁을 먹는데 모두가 시큰둥하니 정이 모아지지 않았다. 누군가 이야기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관심이 없다. 마치 낯선 사람들의 모임에라도 온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 난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을 냈다. 식사 후 일어서려는데 한 친구가 커피숍에 가자고 제안을 하였다. 반응이 없다. 그래도 그 친구는 줄곧 커피 한 잔은 해야 한다고 우겨댔다. 친구들은 억지로 끌려가듯 엉거주춤 따라 나섰지만, 그 분위기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꾸진 못하였다. 결국 한 친구가 어머니가 편찮아서 일찍 돌아가야 한다고 일어섰고 우린 그 빌미로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우리 모임이 냉랭해진 것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의 깊이는 얕아졌고 단단했던 우정은 물러졌다. 그러니 함께하는 시간이 어찌 즐겁고 행복하겠는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경솔하고 모진 선언을 하고 말았다.
더 이상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불편하고 속이 아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친구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꽃을 사들고 찾아왔다. 그녀들은 속 좁게 토라진 나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었다.
오해였다. 내가 바라보았던 친구들의 모습은 실제와는 달랐다. 각자 직면해 있는 문제가 다르고 해결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아니 내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다른 사람의 방식을 외면하였는지 모른다. 조금만 불편해지면 참지 못하고 부아를 터뜨리는가 하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멀리해 왔다. 나의 이 지독한 편견과 오만이 이번 같은 일을 빚은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본다. 수신이 제대로 되는지 텔레비전은 꺼지지 않고 있다. 옆에서 나긋나긋하게 드라마를 설명해주는 딸이 밉지 않은지 어머니의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