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심은 꽃
마음에 심은 꽃
이 승 애
정월 대보름에 먹을 묵나물을 꺼내려고 상자를 여니 겨우내 봄빛을 감추고 있던 취나물, 곤드레, 곱싸리나물, 고추나물, 다래순, 고사리가 향긋한 향기를 품어댄다.
그 중에서도 곤드레 나물은 까슬까슬한 촉감이 살아 있어 손끝을 자극한다. 더구나 하얀 옷을 입은 듯 뽀얀 살결은 그날 정선 장터의 추억을 불러온다.
작년 봄 친구들과 모여 곤드레밥을 먹었다. 처음 먹어본 곤드레밥은 부드럽고 쌉싸래한 것이 우리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 맛을 즐기던 한 친구가 정선시장에 가보자고 제안을 했다. 함께 밥을 먹던 친구 몇이 선뜻 찬성하여 정선시장 가는 날을 받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정선시장으로 향하였다.
시장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활기가 넘쳤다.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과 제철을 맞은 갖가지 푸성귀와 특산물로 시장은 매우 풍성하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곳곳에 쌓여있는 더덕과 생황기 더미를 비롯해 각양각색 토종약초와 산나물은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나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신이 나서 이곳저곳 흘끔거리느라 정신을 반쯤 놓아버렸다. 이때 성질 급한 친구가 한 상점에 들어가 마른 나물과 몇 가지 약초를 샀다. 그러자 인심 좋은 아낙이 친절하게 나물 무치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친구는 아낙의 친절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넋 나간 나에게 충동구매를 일으켰다.
“승애야! 여기 있는 물건들이 정말 깨끗하고 좋은 것 같지 않니?”
친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주머니는 머뭇대는 나의 팔을 잡아끌며 산나물이며 토종식품을 안기며 사기를 권유하였다. 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민들레차 한 병과 마른 곤드레나물 한 다발을 구입하고 말았다.
발길을 돌려 조금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서자 이번엔 귀하디귀한 송이버섯이 즐비하다. 귀한 몸값 하느라 반듯한 상자에 싱싱한 솔잎을 베고 누운 송이의 탐스러움은 비켜갈 수 없는 유혹이었다. 뱃심을 부려 그 중 가장 좋은 송이를 골라 흥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귀한 녀석의 몸값을 우리가 원하는 가격으로 깎아내리기는 만만치 않았다. 호기 있게 물건을 잡아든 손이 슬그머니 내려졌다. 흥정이 결렬되자 한껏 부풀었던 흥이 한풀 꺾이고 말았다.
번잡한 시장 골목은 위풍당당했던 우리의 발걸음을 점차 느려지게 하였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몸을 이끌고 간신히 골목을 빠져 나왔을 때 떡 벌어지게 차려놓은 버섯상자가 눈길을 끌었다. 생김새가 새송이버섯를 닮았는데 좀 더 크고 향이 짙었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젊은 아낙이 팔을 잡고는 마치 고향사람이라도 만난 듯 반긴다. 그녀의 반색에 어정쩡하게 멈추어선 우리들 입속에 그녀의 넉넉한 인심이 쏟아져 들어왔다. 참기름과 소금에 알맞게 버무려진 버섯 맛은 일품이었다. 새로 개발된 큰송이버섯이란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송이버섯을 구입하지 못한 아쉬움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우리는 이렇게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새로운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추구하던 것이 빗나갔으면 어떠랴. 잡고 있던 끈을 놓쳤을 때의 낭패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새로운 도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시장을 다시 한 번 돌기 시작하자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자연산 곰취, 취나물, 참나물, 곤드레나물의 초록 물결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골 아낙네들의 구수한 인상과 정이 어우러진 정선장터의 훈훈함에 젖어 나물을 종류별로 골고루 한 아름씩 샀는데 산 것 보다 덤이 더 많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점점 발이 아파오고 시장기가 돌아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었다. 우리는 먹자골목으로 들어가 제일 근사해 보이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아! 그곳에 적혀있는 황홀한 메뉴. 황기보쌈 제일 큰 것으로 한 접시, 올챙이국수, 수수부꾸미, 산초두부에 송이동동주 한 주전자 시켰다. 인심 좋은 주인아저씨가 자연산 더덕구이 한 접시를 덤으로 주셨다. 우리는 따뜻한 시골의 인심에 정말 맛있는 식사를 하였다.
배가 부르고 약간 취기가 오른 일행은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제2탐방에 나섰다. 약초시장에 들러 약초 몇 가지 더 구입하였다. 황기는 제일 좋은 놈으로 한 다발, 몸에 좋다는 헛개나무 한 다발, 산청목이랑 가시오가피도 한 다발씩 사 들고 신명나는 노랫가락 소리에 이끌려 들어선 골목엔 옛 정취가 깃든 마당놀이가 한창이었다. 어르신들의 흥겨운 춤사위가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하였다. 공연을 즐기고 배가 부른대도 음식 체험장에 들러 메밀부침이 한 접시 먹고 나니 어느새 활기차던 장터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삶의 노곤함 속에서도 때 묻지 않은 시골 아낙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정은 그동안 메말랐던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적셔주었다. 특별히 곤드레나물을 팔던 할머니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은 내 마음에 따뜻한 점으로 남아있다. 투박하고 굽은 손, 허리는 오랜 노동으로 비스듬하게 기울고 다리는 절룩댔지만,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도 푸근하고 아름다웠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낯선 방문객이 혹여 잘못된 물건을 사들일까봐 일일이 쫓아다니며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무엇이라도 사례하고 싶었지만, 노인은 극구 사양하였다.
삶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때 묻지 않은 노인의 심성은 지치고 각박해진 우리 마음에 한 떨기 꽃을 심어주었다. 그 꽃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이식되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로운 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
2015년 10월 수필과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