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힘
자비의 힘
삶의 여정에서 어떤 일에 만족을 느끼거나 즐거움과 흥겨움을 느끼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아마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리라. 그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이 쌓여 삶의 에너지가 된다. 난 오늘도 어떤 상황에서든‘괜찮다.’고 토닥여 주고 안아주는 어머니와 가족이 있어 생의 엔진을 가동시키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쯤 되는 여름날이었다. 어머니께서 예쁜 슬리퍼를 사오셨다. 은은한 파란색에 장미꽃 그림이 그려져 있어 무척 아름다웠다. 이튿날 슬리퍼를 신고 학교엘 가니 친구들이 부러워하며 서로 신어보려고 안달을 냈다. 뿌듯한 마음으로 수업을 마치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몇 킬로 떨어진 순이네 집으로 놀러 갔다.
삼복더위에 뛰어놀던 우리는 더위를 식히려고 냇가로 향하였다. 아이들은 너도나도 신발과 겉옷을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슬리퍼를 잃어버릴까봐 선뜻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물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친구들은 신발을 벗어 놓고 어서 들어와 놀자고 하였지만, 혹여라도 잃어버릴세라 슬리퍼를 신은 채 물속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물속의 쾌감은 곧 슬리퍼의 중요성을 잊게 했다. 물놀이를 마치고 나왔을 땐 애지중지 여기던 슬리퍼 한 짝이 보이지 않았다. 현기증이 일며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였다.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샅샅이 뒤져도 이미 떠내려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해가 뉘엿 저물어가자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가자고 채근을 하였다. 신발을 찾지 못한 나는 엉엉 울며 조금만 더 찾자고 졸라댔다. 어둠이 점차 짙은 색을 띠기 시작하자 친구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며 징징대는 나를 이끌고 집으로 향하였다. 어려운 살림에 사 오신 귀한 신을 잃은 죄책감에 마음은 천근만근 가라앉았다. 밤길에 맨발로 걷자니 고통스럽기가 그지없었지만, 그 고통보다도 슬리퍼를 잃었다는 슬픔과 어머니께 혼이 나기라도 할까봐 두려움이 앞섰다.
밤 아홉 시가 넘도록 오지 않는 딸아이를 위해 동구밖까지 나와 기다리시던 어머니는 절룩거리며 걸어오는 나를 향해 달려와 껴안으셨다.
“승애야! 괜찮니? 다리는 왜 절어.”
하시며 발을 살피셨다.
“엄마! 슬리퍼를 잃어버렸어요.”
웅얼거리듯 말해 놓고는 엉엉 울어댔다. 어머니께서는 신발을 잃어버렸다는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친 데는 없느냐며 여기저기 살피셨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던 딸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셨던 모양이다. 걱정으로 잔뜩 움츠려 있던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에 뜨거운 감동이 솟구쳐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며칠 후 어머니께서 새 슬리퍼를 사 오셨다. 슬리퍼를 잃어버리고 고무신만 신는 딸이 애련하셨나보다.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어머니 모습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신발 때문에 가졌던 죄책감을 말끔히 씻어주신 어머니의 자비는 무한한 생명의 에너지다. 내 존재를 소중하게 다루는 생명의 에너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느꼈던 기쁨은 내 생명의 끈이 되어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2013. 3. 14.
2015년 2월 법의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