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창작수필

옛집과 어머니

이승애 2021. 5. 20. 15:26

옛집과 어머니

 

이승애

 

기억을 잃은 어머니가 집에 가자고 성화를 하신다. 오늘도 어머니는 신음처럼 집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낸다. 기어이 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 옛집으로 향하였다.

새롭게 단장한 집이 옛 주인을 알아보고 넌지시 웃음을 짓는다. 인기척에 주인이 빠꼼이 고개를 내밀더니 전 주인임을 확인하고는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어머니의 안색이 어둡다. 낯선 환경과 주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시더니 우리 집으로 가잔다. 여기가 우리가 살던 집이라고 해도 믿질 않는다. 나는 재빠르게 휠체어를 밀고 마당을 가로질러 샘가로 향하였다. 수국이 다보록하게 잎을 피웠다. 어머니께서 손수 심으셨던 나무와 꽃들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한다. 그제야 어머니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주인이 내온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내내 어머니 얼굴에 만감이 교차한다. 이곳저곳 살피시던 어머니의 눈이 감나무에 머무른다. 우리가 이사 오든 해 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심으신 감나무다. 어머니는 해마다 감을 수확할 때면 아버지를 떠올리곤 하였다. 혹여 감나무 밑에 풀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기라도 하면 득달같이 뽑아내곤 했다. 어머니 눈가가 촉촉해진다. 우리 가족의 그 숱한 날들을 부여잡고 계시나 보다.

오십여 년 전 괴산에 살던 우리는 아버지께서 증평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자 불가피하게 이사를 해야 했다. 각중에 집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급한 대로 직장 동료분께 부탁하여 읍내에서 십여 리 떨어진 시골집을 구하게 되었다. 흙벽돌로 지은 방 두 칸짜리 초가집이었는데 툭하면 쥐가 들고 웃풍이 셌다. 아버지는 틈틈이 벽돌을 찍어 벽을 보수하고 낡은 지붕을 걷어낸 후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방도 두어 칸 더 늘려 아들 방과 서재를 만들고 마루를 놓고 유리문까지 해 달았다. 작고 볼품없던 집이 그런대로 규모를 갖춘 집이 되었다.

아버지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직장을 그만두시고 가축을 기르기로 하였다. 집과 접한 땅을 사들여 축사를 짓고 한우 몇십 마리와 돼지 오십여 마리, 닭 삼백여 마리를 들였다. 그러나 아무 경험 없이 시작한 목장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비싼 값에 사들인 가축은 싼값에 팔려나갔고, 사룟값은 수시로 널뛰기를 하는 바람에 경제난에 허덕이는 날이 많았다. 부모님은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둥댔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언니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발령이 나고 목장도 조금씩 소생하기 시작했지만, 아버지가 회갑연을 하고 일주일 되던 날, 홀연히 하늘나라로 떠나시고 말았다. 아버지께서 황망하게 소천하시자 혈기가 넘쳐흐르던 집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노동과 고단함이 켜켜이 쌓인 집과 목장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감당하기 어려웠다. 차츰 가축의 수를 줄이다 결국 목장의 명패를 내리고 말았다. 그것이 마음에 병이 된 것일까. 건강하시던 어머니께서 시름시름 앓으시더니 극도로 쇠약해졌다. 혼자 생활이 어려워진 어머니는 내게로 오셨고, 집은 동그마니 혼자 남게 되었다. 그동안 마주했던 목장까지 헐리게 되자 그 외로움은 더 짙어져 몸살을 앓더니 급기야 폐가의 처지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형제들이 자주 들락거리며 숨을 불어 넣으려 애를 썼지만,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집은 입을 꾹 다문 채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융성했던 집의 쇠락은 대주의 죽음처럼 우리 가슴을 짓눌렀다. 오빠는 목수를 불러 수리를 부탁했다. 그는 집을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의 말에 수긍하지 못하였다. 좋은 목수를 만나면 집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불러 탈이 난 부분을 손보게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사나흘이 멀다 하고 시골집을 들락대다 보니 그러잖아도 부실했던 몸에 탈이 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딸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자 밤낮없이 고민하시더니 집을 내놓자고 했다. 기어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도시를 떠돌다 우연히 불시착한 곳, 비록 누추했지만, 우리 가족을 오십여 년 넘게 품어준 집이다. 어느 땐 대주의 죽음이 인장처럼 남아 슬픔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정성과 피와 땀이 핏줄처럼 퍼져있던 옛집이 그리워지곤 한다.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시는 어머니는 너른 마당에 토마토며 오이, 가지, 상추, 쑥갓, 호박 등을 심어 이웃에게 나눠주었고, 사시사철 꽃과 나무를 가꿔 온 집안 가득 생기를 불어넣곤 하였다. 그 향기에 취해 마을 사람들은 밤낮없이 모여들었고, 어머니는 상담사요, 해결사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런 어머니가 복잡한 도시에 갇혀 꼼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으니 더더욱 옛집이 그리우시리라. 오늘도 어머니는 흥건히 고여있는 옛 추억을 꺼내 들고 몸살을 앓으시다 나를 채근해 옛집으로 향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 옛집의 내력을 조각조각 풀어내는 어머니 얼굴에 희비가 엇갈린다. 해가 뉘엿뉘엿 서편 산마루로 향하다 앞 유리창에 잠시 머물더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