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혹
이 승 애
가까운 친구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대장에 악성 혹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평소에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자기 관리도 철저히 하던 친구였기에 이 소식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친구 모두 무거운 추를 달은 듯 가라앉았다. 나도 얼마 전 작은 혹 때문에 죽음의 공포를 느낀 적이 있었다. 무엇에 물어뜯긴 듯 아팠고 어둡고 깊은 절망감에 몸서리쳤다.
그동안 차일피일 미루던 약속을 잡고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잠깐의 여유가 생겨 평소엔 관심도 없던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돌리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치아에 대한 건강 상식을 방영하고 있어 지켜보았다. 방송을 듣다 보니 내 치아의 건강상태가 궁금해졌다. 하마같이 입을 쩍 벌리고는 치과의사가 이르는 대로 굴속 같은 입안을 살펴보았다. 왼쪽 어금니와 혀 사이에 은밀하게 감추어졌던 콩알만 한 혹이 나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예전에도 있었나? 아니 그전엔 없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떨리고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요상한 혹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손가락을 넣어 문질러도 보고 만져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혹은 좀처럼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바짝바짝 타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인터넷 검색창에 글자를 써넣으려고 애를 썼다. 자꾸만 오타가 났다. 여러 번 시도 끝에 '구강 내 혹'이라는 글자를 간신히 써넣었다. 곧바로 '구강암'에 관한 글들이 줄지어 나왔다. 인터넷에 올려진 글들이 순식간에 저승사자가 되어 으르렁거렸다.
이제 곧 세상과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했다.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아직은 이 세상에 남고 싶었다. 유난히 병약하여 세상을 떠나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안달을 냈다. 아직 살아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나를 겹겹이 감싸고 있는 부모형제, 친구, 이웃, 그밖에 맺어진 인연들이 줄줄이 생각났다. 그래서 난 살기를 간절히 갈망하였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리되지 않은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정리정돈을 하려고 애썼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괜스레 책을 뺏다 꽂았다 하다가는 책장 주변에 널려있는 물건들을 두서없이 상자에 내동댕이치듯 던져 넣었다. 커다란 상자가 넘쳐 산더미가 되었지만, 과열된 머릿속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채 밤을 꼬박 새고야 말았다.
아침이 되자 벗과의 약속을 미루고 병원으로 향하였다.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방사선촬영을 하고 치료용 의자에 앉았지만 이제 곧 의사가 치명적인 선고를 내릴 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작고 예쁘장한 의사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억지로 태연한 척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뼈예요. 병이 아니에요. 예전부터 있었는데 갑자기 보시게 된 것입니다."라며 싱긋이 웃었다. 바짝 오그라들었던 세포들이 순식간에 확장되며 긴장이 풀렸다. 곧 죽을지 모른다는 지나친 염려는 어이없게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죽음은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른다. 은밀하게 혹은 요란스럽게 올는지도 모른다. 그땐 지금처럼 부정만 할 수 없으리라. 친구처럼 맞이할 순 없어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내 삶의 음계를 성실하게 밟으며 살아야 한다. 비록 거칠고 힘들어도 꿋꿋하게 내게 주어진 길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혹의 발견은 행운의 표징이 되었다. 비록 수십 년 동안 알아차리지 못한 몸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으니 말이다. 죽음의 공포로 몰았던 작은 혹이 인제는 새로운 길이 되었다. 울퉁불퉁 갈림길에서도 오늘의 해프닝은 착한 등불이 되어 비추리라.
서울로 재검사를 받으러 갔던 친구가 돌아왔다. 몸에 도사리고 있는 불청객은 그다지 심각한 놈이 아니란다. 오륙 개월 정도 치료하면 완치된다고 하였다. 시골 의사의 오진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락가락하던 친구가 천진하게 웃고 있다.
한국수필 2016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