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
상수리나무
이승애
천지개벽할 일이 생겼다. 한적한 산골 마을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더니 기계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신도시를 만든다고 하였다. 급기야 산과들이 뭉개지고 죽음의 냄새가 산야를 뒤덮었다.
생명이 무참히 죽어간 자리엔 고층 아파트와 넓고 탄탄한 도로가 만들어졌다. 인간은 그렇게 번듯한 산야를 짓밟고 남의 생명을 빼앗아 욕망의 배를 불렸다. 그들은 예술적 감각을 살려 공원을 만들고 소나무, 산수유, 상수리나무, 이팝나무 등 수십 여종의 나무와 꽃들을 심어 최고의 도시라고 뽐을 냈다.
내가 사는 곳은 그 도시를 꾸며주는 작은 공원인데 야트막한 산과 여신의 눈빛처럼 맑은 호수가 있어 쾌적하고 아늑한 곳이다. 나는 이곳으로 오기 전 인근 야산에 살고 있었는데 생장 속도가 빠르고 강인한 성격을 지녔다 하여 몇몇 친구들과 함께 강제로 이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옮기기 전에 가지치기를 하였다. 그들에겐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행위인지는 모르나 우리에게는 팔과 다리가 무참히 잘리는 고문이었다.
평생 몸담고 살아온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는 쉽지 않았다. 잘린 팔다리가 욱신거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옆 도로에서 품어대는 매연과 소음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히 잠을 자거나 쉴 수가 없었다. 내 옆으로 이주해 온 소나무도 지신이 들었는지 누렇게 말라갔다. 잦은 병치레로 주접이 든 소나무와 나는 서로 의지하며 힘을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느 날 공원 관리인이 오더니 소나무와 나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돌아갔다. 다음날 소나무는 대수술에 들어갔다. 마른 가지를 자르고 몸통에 진흙을 정성껏 바르고 링거를 꽂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내게는 아무런 손길도 주지 않았다. 그들에겐 오직 소나무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야 알았다. 저들의 금수저, 흙수저 논리로 자연에도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나무는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여 곧 건장한 청년의 모습을 되찾았다. 나는 소나무가 다시 옛 모습을 찾게 된 것이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론 몹시 슬펐다. 가뭄에 목이 말라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태풍에 가지가 꺾여 헉헉대는 내 모습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그들이 미웠다. 날이 갈수록 내 몰골은 더욱 처참하게 변해갔다.
슬픔에 젖어 있던 어느 날, 달님이 찾아왔다. 내 보잘것없는 몸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얘야 모든 생명은 귀하단다. 사람들은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계급론으로 삶의 가치를 따지지만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은 그렇지 않단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도 그분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실의에 빠져 있던 나는 달님의 따뜻한 위로에 삶에 대한 의욕이 되살아났다. 앙팡지게 흙살을 움켜쥐고 뿌리를 내렸다. 한 줌 햇살도 놓치지 않으려고 뭉툭한 팔을 힘껏 뻗었다. 비가 오는 날은 빗방울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내 몸 구석구석에 끌어들였다. 아, 신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잘린 뿌리에서 새 살이 돋고, 뭉툭하게 잘린 가지에서 새 가지가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계절이 한 바퀴 돌자 나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보드라운 흙이 발을 간질이고 햇살이 피부를 부빌 때면 내 마음은 한없이 감미로웠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쭉 펴고,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봄이 짙어질수록 가지마다 연두색 이파리가 어여쁜 얼굴을 내밀었다. 곧이어 잎겨드랑이에서 꼬리 모양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다른 꽃처럼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새 생명을 잉태한 어미가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름이 왔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주렁주렁 열린 열매들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거뜬히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내 몸통을 무성하게 뒤덮고 있던 잎사귀가 시들시들 앓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고 깊어만 갔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잎사귀가 오그라들고 구슬처럼 곱던 열매들이 익지도 않은 채 뚝뚝 떨어졌다.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져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이구 상수리나무가 오갈병에 걸렸네. 지지리 궁상이야. 다른 나무에도 병이 옮을까 겁이 나는구먼.”
사람들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바라볼 때마다 내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점점 깊어가는 병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비록 내 모습은 처참하게 변해가도 남은 열매들은 내 심정을 아는지 끝까지 버티어주었다.
가을 햇살에 토실토실하게 열매가 익어 가고 나도 덩달아 기운이 났다. 함께 사는 친구들도, 바람도, 내 몸을 토닥이며 찬사를 보냈다. 깊어 가는 가을날, 장정 서넛이 다가왔다. 생전 눈 한번 마주치지 않던 사람들이 때가 되었다는 듯 내 몸을 올려다보았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건장한 남자가 내 몸통을 흔들더니 몽둥이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살갗이 찢겨져 나갔다. 맞은 자리가 욱신거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열매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장정들은 연거푸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돌아왔을 땐 이미 내 열매를 모두 가지고 떠난 뒤였다. 목이 메었다. 자연은 때가 되면 스스로 내려놓을 줄 알거 늘. 굳이 약탈을 일삼는 저 성급하고 무정한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가으내 바시랑대다 보니 어느새 겨울이 왔다.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어젯밤 눈이 내렸다. 살포시 내려앉아 어찌나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지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기 시작하였다. 나는 결코 가엾거나 불행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상수리나무에 불과하지만, 나는 위대한 섭리를 이어가는 자연의 소산물이다. 금수저도 흙수저도 아닌 오롯한 상수리나무이다.
2018년 9월 수필과비평 다시 읽는 문제작
허상문 작품론
〈상수리나무〉는 상수리나무의 잔혹한 삶의 변천사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상수리나무를 의인화하여 그 삶의 기록을 좇는다. 작품에서 상수리나무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메타포로 작용하지만, 상수리나무라는 질료는 단순한 묘사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포적 의미에서의 외연적 의미의 확장성을 띠게 된다.
오늘날 인간은 때로는 이용 가치로 혹은 개발의 도구로 자연을 함부로 대하면서 나무를 베고 꺾는다. 산업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등장한 이래 인간은 자연을 오직 이용의 도구로만 생각한다. 자연을 자원의 집합체정도로만 생각하고 ‘도구적 가치’로서의 자연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지금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자연재해와 환경위기의 근원은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잘못된 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오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적 가치로 파악하며 끊임없이 개발하고 착취한다.
상수리나무와 자연에 대한 작가의 미적 체험은 다분히 비극적이다. 작가는 상수리나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사는 곳은 그 도시를 꾸며주는 작은 공원인데 야트막한 산과 여신의 눈빛처럼 맑은 호수가 있어 쾌적하고 아늑한 곳이다. 나는 이곳으로 오기 전 인근 야산에 살고 있었는데 생장 속도가 빠르고 강인한 성격을 지녔다 하여 몇몇 친구들과 함께 강제로 이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옮기기 전에 가지치기를 하였다. 그들에겐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행위인지는 모르나 우리에게는 팔과 다리가 무참히 잘리는 고문이었다.
상수리나무는 평생 몸담고 살아온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 떠다니면서 새로운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 잘린 팔다리가 욱신거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고, 도로에서 뿜어대는 매연과 소음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히 잠을 자거나 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자신의 옆으로 이주해 온 소나무도 누렇게 말라간다. 그들은 집을 떠나 도시에 내던져진 채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상수리나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애련하다. 이것은 바로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인간에 대한 질책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얘야, 모든 생명은 귀하단다. 사람들은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계급론으로 삶의 가치를 따지지만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은 그렇지 않단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도 그분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작가는 상수리나무에 대한 새로운 미적 인식을 문학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체험함으로써 인간 세계의 문제점을 제시코자 한다. 인간의 삶은 매 순간 독자적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상, 인간과 자연을 통해 삶은 연속되고 유지되는 결과이다. 〈상수리나무〉에서 작가는 자연과 인간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자연과의 결정적인 유대감을 통해서라고 여긴다. 또한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인간은 자연과의 공존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의에 빠져 있던 나는 달님의 따뜻한 위로에 삶에 대한 의욕이 되살아났다. 앙팡지게 흙살을 움켜쥐고 뿌리를 내렸다. 한 줌 햇살도 놓치지 않으려고 뭉툭한 팔을 힘껏 뻗었다. 비가 오는 날은 빗방울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내 몸 구석구석에 끌어들였다. 아, 신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잘린 뿌리에서 새 살이 돋고, 뭉툭하게 잘린 가지에서 새 가지가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계절이 한 바퀴 돌자 나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작가는 생명의 미적 가치를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생명성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파멸성 때문에 파괴될 수 있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그가 뜻하는 바대로 의미에 충실한 발화를 할 수 없는 존재다. 결핍은 욕망을 낳고, 인간은 욕구의 충족에 그치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히 새로운 욕망을 추구한다. 그로 인해 인간성의 파괴가 자연환경의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상수리나무〉에서 작가는 인간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생태적 삶의 다양성과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과의 대립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행해지는 미적 인식이며,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생존을 휘한 미의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작가의 “나는 결코 가엾거나 불행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상수리나무에 불과하지만, 나는 위대한 섭리를 이어가는 자연의 소산물이다. 금수저도 흙수저도 아닌 오롯한 상수리나무이다.”라는 발언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연과 생명의 미적 가치에 소홀한 인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철학과 문학의 영원한 숙제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과 철학이 추구하는 바는 같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불우한 삶의 구원과 해방이 인간의 영원한 숙제라면, 문학과 철학이 상반된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상수리나무〉에서 작가는 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받아들이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것이 인간구원의 길임을 상수리나무를 통하여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