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의 의미
이승애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 하나쯤은 지고 살아간다. 아니 십자가라는 이정표를 따라 산다고 할 만큼 삶과 필연적인 관계에 있지만,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십자가가 고통과 실패, 절망과 수치, 죽음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부정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극기와 사랑, 봉사와 희생, 순종과 포기, 친교와 자기극복까지 포함하고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서약한 적이 있었다. 스물아홉이었다. 세속의 옷을 벗고 순명과 순결, 청빈의 옷을 갈아입은 나는 기쁘게 십자가를 따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체중이 급속히 감소하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시도 때도 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무릎이 붓고 아팠다. 육신에 병이 들자 그 맹세가 점점 버거워졌다. 급기야 수도자의 미덕으로 여겼던 그 십자가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였다. 치료를 받아도 육신의 병은 더 짙어지고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마음에서 끊임없이 바람이 일었다. 그 암울한 바람에 휘청거리다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그만 십자가를 팽개치듯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 아픔은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또 다른 나의 십자가가 되었다.
필연처럼 따라다니는 십자가는 삶의 굴레였다. 나는 지금도 삼분의 일쯤 기능을 잃은 팔과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일상,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다. 수도원에서 십자가가 삶의 목적이었다면, 지금 십자가는 견디고 극복해야 하는 과제이다.
홍수희 시인은 ‘십자가’는 ‘나를 업고 가는 길이요, 참아주는 길, 절망하고 어려울 때 토닥이며 가는 길, 나를 만나게 해주는 길’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직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완성을 향해 골고타 언덕을 오르던 예수님처럼 그 언덕에 머물러 있다. 언젠가는 나를 만나는 길, 완성의 길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다만 용기를 내어 극복하고 인내와 순종으로 지고 가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 홍수희 시인의 <십자가의 길>처럼 말이다.
내가 나를
업고 가는 길입니다
내가 나를
참아주며 걸어가는 길입니다
끊임없이
내가 나를 실망시킬 때에
나에게는 내가
가장 큰 절망이 될 때에
내가 나를 사랑함이
미워하는 것보다 어려울 때에
괜찮다
토닥이며 가는 길입니다
위로하며
화해하며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밖에 서 있지 않고
십자가는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휘청이며 넘어지며
깨닫는 그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내가 나를 만나는 길입니다
홍수희의 <십자가의 길> 전문 -
홍수희 시인은 십자가를 인생의 동반자로 인식하였고 십자가가 삶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깊은 신앙과 자기성찰을 통해 그리스도와 합일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순종하기까지 시인은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무수히 반복하였으리라.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은 믿음에서 온다. 윤동주 시인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십자가에서 기꺼이 순교하겠다고 했다. 그는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희생된 형틀이며 구원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십자가를 극복하기까지 수없이 번민하고 방황하였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며 추구하는 삶의 목표와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희생이 조국의 광복을 위한 것이라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겠다’고 자기희생적 순교 의지를 보인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윤동주의 <십자가> 전문 -
윤동주 시인은 끝내 부활한 조국을 보지 못한 채, 적국의 감옥에서 그리던 간도의 하늘을 보지 못한 채 숨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깊은 암흑 속에서도 치욕적인 삶을 살지 않으려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고 끝끝내 자신의 윤리관을 지켜내기 위해 발버둥쳤다.
지금 이 시대에 십자가는 교회를 알려주는 표지물로 전락하였다. 십자가는 단순히 종탑 위에 세워진 가시적인 상징물이 아니다. 고통과 불의, 절망과 실패를 극복하고 일어서는 희망과 사랑, 구원의 근원이다. 도덕성도 정체正體감도 부끄러움도 사라져가는 이 세태에 윤동주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을까. 어두운 현실을 시를 통해서 표현하고 조국을 위해 희생적, 순교적 사명감으로 스스로를 일깨우는 시인의 진정성이 눈물겹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라는 제목 아래 그의 시혼은 또다시 우리 가슴에 한 줄기 신선한 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그리며 내가 지고 온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창작산맥 2017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