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애 2015. 1. 7. 22:32

신호등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들 몇이 소란스럽게 걸어오더니 신호등을 보지 않고 건널목을 건넜다. 이어서 청년 둘이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은근 슬쩍 무단횡단을 한다. 달려오던 차들의 급브레이크로 거리는 잠시 통제력을 잃는다. 곧이어 불끈한 운전자들의 육두문자가 조롱하듯 실실대는 그들 꽁무니를 뒤따르다 흩어진다. 빨간색 신호등이 제 할 일을 다한 듯 푸른색 신호등에게 바통을 넘겼다. 양측의 팽팽한 실랑이에 마음이 뺏겨 한눈팔던 시선을 황급히 거두고 길을 건너려니 이번엔 차들이 건널 틈을 주지 않는다. 신호는 깜박깜박 초를 재는데 나는 엉거주춤 발걸음을 떼다 제자리로 돌아와 멋쩍은 모습으로 서 있고 말았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양심의 신호등이 켜진다. 겉은 반듯한 시민이지만 속은 신호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무법자인 것을. 그러면서도 남이 저지르는 잘못엔 눈을 시퍼렇게 뜨고 트집을 잡는 쫌생이요, 앞뒤 가릴 줄 모르는 위인이다 보니 남에게 상처주기가 일쑤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약속한 시간보다 늦으면 이유를 묻기도 전에 앵돌아져 타박을 한다. 운전 중에 앞차가 더디게 가면 알짱거린다고 불끈한 성미로 파르르 하고, 물건을 살 때나 볼일을 볼 때 계산된 시간보다 지체되면 짜증을 낸다. 이러니 나야말로 신호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난폭한 자가 아니겠는가.

얼마 전 청주로 가기 위해 차를 몰고 길을 나선 적이 있다. 사거리에 이르자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빨강의 위엄 앞에 다소곳하게 차를 정차하려는데 뒤꽁무니를 바짝 따르던 뒤차가 경적을 울리며 으름장을 놓아 가까스로 건널목 선상 너머에 정차하였다. 엄연한 법 앞에 감히 범법행위를 종용하는 그의 무례함에 노한 나는 브레이크를 꽉 밟고 버티었다. 그러자 그는 몰염치한 얼굴을 내밀고 험한 욕설을 한바가지 퍼부었다. 아직 빨간색 신호의 권위가 떡 버티고 있는데 그는 비리를 저지를 요량으로 경적을 울리며 또다시 위협하였다. 나의 심약한 발은 자제력을 잃고 브레이크에서 미끄러졌다. 좌회전하던 차가 질주의 본능을 잃고 곡선을 그으며 묘기를 부렸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그 순간에 용케도 발은 기민성을 보였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뒤차 운전자는 또 한 번의 도발을 시도했다. 위험한 순간마저 기다리지 못하고 안달하는 저 젊은이에게 나는 어떤 태도로 맞서야 하는 것인가. 치미는 부아를 자제하느라 용을 쓰다 보니 운전대를 잡은 손은 자꾸만 떨리고 온 몸이 저렸다. 마침내 신호가 바뀌고 그 젊은이에게서 해방되었을 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 사건 이후부터는 주황색 신호등의 경고 앞에서도 가속페달에 힘을 가해 힘껏 달림으로써 빨간 신호등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묘한 위기 모면은 또 다른 불안감을 가져왔다. 신호등에 대한 예를 갖추지 못한 자의 죄의 본능은 께름칙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성급한 뒤차의 운전자에게 욕을 먹더라도 주황색 경고등에 순응하는 것이 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호등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역할을 한다. 푸른색으로 질주만을 하게 하거나 빨간색으로 마냥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질주와 멈춤을 적절히 조절해 조화를 이룬다. 신호등 앞에 서면 남을 배려하는 법을 배운다. 기다림을 배우고, 절제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도 살다 보면 신호등에 걸려 멈추어 서야 하는 때가 있다. 건강의 여부를 살피거나 일들의 성패를 가리기 위해선 신호가 주는 의미를 잘 깨달을 필요가 있다. 만약에 신호의 권위를 무시한다면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다. 경고등 앞에서 은근 슬쩍 넘어가다 보면 건강을 잃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후회하지만 성급함 때문에 잘못을 되풀이하곤 한다.

오늘 나에게 켜진 신호등은 어떤 빛깔일까. 혹시 주황색의 경고등은 아닐는지. 어쩜 이미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볼 일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푸른 신호등이 순탄한 길을 인도하기도 하고 빨간 신호등이 쉼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 신호등을 잘 알아차리는 것이 삶이 지혜가 아니겠는가.

 

 

2014. 2. 7.

 

  문예감성 11호(2015년 봄, 여름호)